통일에 대하여
(WWW.SURPRISE.OR.KR / 탁류 / 2020-02-17)
1. 어렵다
우리가 미래를 그리는 경우에 쉬운 경우가 있고 어려운 경우가 있다. 쉬운 경우는 어제 놀았고 오늘 놀고 있다면 내일은 틀림없이 빈털터리일 것임을 그리는 경우다. 이런 흐름은 자연스러움을 동반한다. 게으른 놈이 갑자기 땀 흘리며 일하지 않는다. 그래서 게으른 놈이나 아주 성실한 놈의 미래를 예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통일은 예견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조선과 아메리카의 두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2. 통일은 달리기다
출발부터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가는 차는 없다. 통일은 자동차가 점점 가속하여 결승점을 통과하는 사건에 가깝다. 그 이유는 분단이 우리 민족에겐 100점(해방)에서 0점(분단)으로 추락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일은 속도 0에서 100으로 재가속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작은 느리고 변화가 거의 없다가 일정 구간을 통과하게 되면 탄력이 붙고 최고속도에 도달하는 지점이 온다. 우리는 가속구간을 통과하고 있다. 그곳에 우리는 언젠간 도달한다. 아메리카는 달리는 조선의 여정에 가시나무를 던지고 돌을 던져온 자들이다. 우리는 달리는 조선의 여정에 오른 손을 내밀어 격려하는 채 하면서 왼손으로 슬며시 압정을 뿌렸다. 그리고 조선은 발바닥에 피를 흘리며 꼬꾸라지며 그 길을 한결같이 달렸다. 남한 정부는 통일을 향해 달려가는 차가 아니다.
3. 통일의 조건; 일원화된 무력사용의 주체
통일의 조건과 형태에 관해 나는 아는 게 없다. 그러나 신혼부부가 조건이 다 맞아서 결혼하는 건 아니잖은가. 항상 결혼하고 애가 나오는 거 아니고 배가 부른 다음 결혼하기도 한다. 그렇다. 최소한의 조건만 주어지면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사랑과 단칸방이면 구중궁궐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한 가운데 조각그림 하나면 주변을 둘러싼 나머지 조각 그림들의 안쪽 면을 그릴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
조선의 창은 점점 길어져 조선과 아메리카 사이의 거리를 0으로 만들었다. 언제든 아메리카의 눈에 창을 찔러 넣을 수 있다. 아메리카는 어제 칼과 창을 휘두르고 다녔다. 지금은 키보드와 종이화폐와 바이러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내일은 펜과 잉크를 준비할 것이다. 이것은 아메리카가 ‘폭압과 전횡이 없는 공정한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필연적 과정이다. 아메리카가 펜과 잉크를 이용해 조선이 내미는 문서에 서명한다면 그 내용의 핵심은 무엇일까?
‘폭압과 전횡’이 없는 과정으로 나아가려면 조선과 아메리카는 창과 칼을 사용하지 않음을 상호 보장해야 한다. 어느 쪽도 창으로 상대의 눈을 찌르지 않음을 약속해야 한다. 대북적대시 정책의 종료이며 대미적대시 정책의 종료다. 아메리카에겐 조선이 무력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는다는 단단한 보장이 요구된다. 그러자면 한반도의 무력사용 주체가 이원화되어 있지 않고 일원화되어 있어야 한다. 한반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아메리카에 대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주체가 어디인가? 조선이다. 아메리카가 남한 정부에 전시작전권을 이양하지 않는 것은 조미협정 이전에 한반도에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두 개의 독립된 주체가 생겨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카드를 아메리카는 쥐고 있어야 한다.
4. 전시작전권 귀속의 문제
1950년 7월 14일 전시작전권 이양에서부터 2018년 최근 50차에 이른 한미안보협의회(SCM)들은 아메리카가 전시작전권을 남한 정부에 이양하지 않고 남한 정부가 이를 환수하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상호 노력의 산물이다. 전시작전권을 가진 남한 정부는 안전핀을 뽑은 상태의 수류탄과 같다. 2018년 한미안보협의회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양국은 전시작전권 전환 준비가 양국의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에 힘입어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하고 전시작전권 전환 조건을 조기에 충족시킬 수 있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기로…” 2005년 10월 21일, 2006년 1월 25일, 2006년 8월 4일, 2009년 10월 22일, 2010년 6월 27일, 2013년 10월 2일, 2014년 10월 23일, 2017년 10월 28일, 환수는 없었다. 본질(환수)이 없는 외피(핑계)만 가득한 화려한 수사의 결정판이다.
전시작전권의 이양은 헌법에 위배되며 대한민국의 헌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사실상 부속된 신세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1950년 전시작전권의 이양이 명백한 주권 포기에 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하지 않는다. 꼬이고 꼬인 법률적 해석의 문제를 포함해서 해괴한 전시작전권 이양과 환수 문제를 한미 어느 쪽도 해결할 수 없다.
1945년 9월 9일 맥아더의 “조선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제 1호 포고는 아메리카의 조선 점령을 선포한 것이며, 1950년 7월 14일 이승만이 평시, 전시작전권을 맥아더에게 이양한 것은 그에 따른 이행 행위에 해당한다. 즉, 남한 정부는 주권을 아메리카에 이양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아메리카는 그것을 남한 정부에 귀속시킬 의사가 없다. 이것이 본질이다. 아메리카는 사실상 남한 정부의 군사주권을 대리한다. 남한 정부는 아메리카의 1+1 정부다. 하나 사면 하나 따라오는 정부다. 그래서 전시작전권은 이양과 환수의 문제가 아니다. 남한 정부가 틈이 날 때 마다 명시적으로 전시작전권 환수를 목적한다는 것을 밝힌 것은 아메리카가 아니라 사실상 조선에 보내는 “내용증명”이라는 꼼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메리카가 조선과 관계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나선다면 아메리카는 남한 정부의 군사 주권을 대리하는 자의 자격을 가진다. 그리고 아메리카가 조선과 평화협정에 서명한다는 것은 자동으로 전시작전권이 조선에 귀속됨을 의미한다. 조선에 전시작전권이 귀속된 다음에라야 조선은 아메리카와 상호불가침 조약을 추진할 수 있다.
5. 아메리카의 딜레마
조미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조선에 전시작전권을 귀속시키지 않으려면 아메리카가 남한 정부에 전시작전권을 이양해주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아메리카가 남한 정부에 전시작전권을 이양한다는 것은 조미 사이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남한 정부가 조미 사이에서 쇼당을 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메리카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둔군지위에관한협정을 파기해야 한다. 남한 정부가 전시작전권을 환수한 이상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둔군지위에관한협정이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다. 전시작전권이 이양되는 순간 남한 정부는 아메리카의 통제를 벗어난다. 남한 정부를 총알받이로 사용하는 것도, 현금인출기로 사용하는 것도, 한미일 동맹에 묶어두는 것도 모두 아메리카가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만 유효하다. 아메리카는 줄 수도 안 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6. 맺음말
우리가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것, 아메리카가 어떤 길도 선택하고 싶지 않은 네거리로 내몰리는 것, 모두 조선의 무력 압박이 불러온 변화들이다. 비가 내린다. 조선의 강산 어디에나 비가 내렸다. 극동의 대지에 내린 비는 조국 강산에 물을 머금고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웅덩이에 일본의 군화가 풍덩하고 담긴다. 그러자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일본이라는 힘이 빠져 나가자 쉬지 않고 아메리카의 군화가 풍덩하고 들어온다. 다시 조국 강산 구석구석으로 흙탕물이 튀었다. 이제 아메리카의 군화가 물러간다면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올 것인가? 쉽다. 아메리카의 군화가 발을 빼는 순간 저 멀리 북쪽으로 튀었던 물이 다시 웅덩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 물은 원래 조선의 물이었다. 자연은 힘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들판에 홀로 선 나무를 보라. 그 나무는 결코 동종의 나무들과 동떨어져 있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다른 나무에 기대지도 않는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자신이 뿌리를 내린 땅과 하늘 사이에서 서 있다. 우리도 그렇게 극동에 서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사는 이유다. 상처 난 강토를 보듬어 안고 천손 만손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