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집
(WWW.SURPRISE.OR.KR / 탁류 / 2020-03-26)

오지호의 남향집을 본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미술관에 들러 오늘도 허탕을 쳤다는 실망감에 축 쳐진 어깨로 나가려는 순간, 내 뒤에 걸린 어떤 그림이 하나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미술 교과서에서 조그만 그림으로 본 적이 있는 남향집이었다.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곧 문을 닫을 예정이었던 미술관에서 나는 뚫어져라 남향집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문학을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선생님은 좋아하는 그림 한 점을 찾아보고 비평문을 써오라고 했다. 그림이라는 언어에 낯설었던 나는 하루 종일 미술관을 헤매다가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야 나에게 말을 거는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내 머리 속에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쏘다니며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먼지를 자욱하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온통 뿌옇기만 하던 남향집이 내게 남긴 인상을 그날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문자로 변환하던 기억이 난다. 난 항상 마감 전날이 되면 머리가 팍팍 돌아갔다. 오늘 다시 그 남향집이 생각났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인상이 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따사한 햇빛이 비치는 집 밖 풍경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보이지 않는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입구를 막아선 빨간 옷을 입은 소녀에게서 멈추게 될 것이다. 거기서 멈춰야 한다. 거기가 깔때기의 맨 아래 주둥이다. 사방의 물이 아래로 흘러 모이듯, 캔버스 곳곳을 탐색하던 모든 시선은 그 지점에 모여든다. 오지호가 하고 싶은 말은 저 붉은 옷을 입은 소녀에게 모아져 있다.

먼저, 내가 약 30년 전에 처음 주목했던 요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39년 일제강점기 개성 오지호의 집을 그린 남향집의 빛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지호는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와 1939년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미술 교사로 지내던 시절에 남향집을 그렸다. 그리고 나는 저 따사한 빛에 마음을 빼앗겼다. 빛은 계절과 시각 그리고 풍토에 따른 독특한 색과 온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조선의 지방색이다. 어렴풋이 더듬어보면 1977년 즈음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를 맞았을 때였다. 2교시가 끝나면 양초를 문질러 걸레질을 해 놓은 나무로 된 교실 바닥은 발바닥하고 원수가 졌는지 아이들은 모두 발을 들어 올려 책상 아랫부분을 수평으로 가로지른 걸대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학교에서 양항골 제재소에서 실어 온 나무를 아낀다고 3교시부턴 난로를 끄게 한 탓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2교시 끝나는 종이 울리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쪼르르르 남쪽을 향해 서 있던 교사와 화단 사이에 난 폭이 좁은 자갈길위에 기대고 서서 햇볕을 쪼이곤 했다. 이가 득실거리는 머리를 하고 나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오들오들 떨며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곤 했다. 노릇노릇했다. 나무에 새싹이 돋아나지 않았던 이른 봄볕은 노릇노릇했다. 응달보단 한없이 따사로우면서도 충분히 따뜻하지는 않은, 그래서 늘 배고픈 온도를 가진 그런 빛이었다. 그러면 손이란 손은 죄다 주머니 안에 기어들어간다. 마치 그림 속 담벼락 앞에 잠이 든 개처럼 우리는 봄볕을 과자처럼 씹어 먹고 있었다. 남향집을 보았을 때, 내 몸은 나에게 그때의 인상을 금방 떠올리지 못하고 “가만있자… 이거 그건데… 언제 꺼드라… 어디 있을 텐데…”하면서 기억의 창고를 뒤지느라 여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남향집의 빛은 조선의 빛이다. 오지호가 그 조선의 빛을 “나는 일본에 와서야 비로소 내 나라 조선의 자연이 맑고 환한 줄 알았습니다……. 나는 일본의 그림들이 어두운데 하나의 의문을 느꼈어요. 얼마 가지 않아 그게 자연의 영향에서 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이해했다.

진달래꽃처럼 따스하고 화사한 조선의 봄볕을 느낀 내가 다음으로 주목했던 것은 나무의 파란 그림자였다. 처음엔 이상했다. “왜 나무 그림자가 시커멓지 않고 파랗지?”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남향집은 어느 모로 보아도 밝고 화사하다. 따사한 기운은 노란 색조를 타고 담쟁이처럼 화폭 전체에 퍼져 있다. 그런데 왜 파란 나무 그림자인가? 그때 나는 오지호 선생님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의 빛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조선만의 빛이요. 그 빛의 토속적 색채는 그림자조차 검지 않고 푸른빛을 띠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이라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나는 일제 강점기 나무 그림자를 지나 하늘까지 뻗어 나가고 있는 저 푸른색에 “tyrannical blue”라는 이름을 붙였던 기억이 난다. 허세가 하늘을 뚫고 우주공간으로 나가고도 남았다.

오늘 남향집이 생각나 다시 그림을 보고나니 빨간 옷을 입은 소녀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후기 인상주의 그림의 특색이기도 한 세부묘사가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 지 알 수 없다. 소녀가 기쁜지, 슬픈지, 그날 어떤 기분이었는지 가늠할 온갖 실마리는 텅 빈 얼굴 속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 1939년 일제강점기의 조선 독립에 대한 염원을 그 텅 빈 얼굴에 심어보고, 조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지 않은 그때의 현실에 비춰보자면 해맑은 소녀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문에 서서 바깥을 응시하는 소녀의 시선은 남향집이 가진 힘이다. 나도 저 소녀처럼 한 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조국의 미래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림 속 소녀는 오지호의 둘째 딸이고, 봄볕을 쬐며 잠든 개는 “삽살개”라고 한다. 만약 오지호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일제강점기 조선의 빛이 가진 화사함과 따사로움을 보여주지 못했을지 모른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화가 오지호께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