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한 아빠들
(WWW.SURPRISE.OR.KR / 탁류 / 2022-02-21)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서술에서 내가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소는 그가 스스로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짧게 피력하는 문장들에서 드러나는 번득이는 통찰이었다. 그중에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한 국가의 정치적 영향력이 다른 국가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요인이라는 점이었다. 바꿔 말하면,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적 영향력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묶음으로 온다. 우리가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정치라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 정치가 뭔가? 이름으로 보자면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좀 더 정확하게 쓰자면 <지배세력이 인간 집단 전체를 바르게 다스리는 행위>다. 이게 전부인가? 뭔가 빠졌다. 바로 <권위>다. 누군가가 누구를 다스리는 데에는 다스림 받는 자들의 무의식적인 요구가 있다. 니가 나를 다스리는 행위(강제)에 어떤 정당성(변명)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게 국가가 가진 권위다.

이 권위는 통치행위에 대한 어떤 <변명거리>다. 이 통치라는 강압적 행위에 대한 이유는 통치를 정당화하는 정치철학으로 발전한다. 유교와 주자, 성리, 양명학의 유입은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낳은 부산물이며 천주교와 기독교는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가져온 필연적 부산물이 된다. 근대 이후 이 땅에 이식된 기독교는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이자 동시에 기존에 우리 민중들의 의식에 자리한 철학적 배경을 대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정치적 영향력이 바뀌면서 종교적 영향력의 대체가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 본질이 이질적 세계관을 주입하는 <세뇌>에 있다. 종교는 철학과 학문으로 다가오며 위에서 전파되고 아래에서 흡수된다. 우리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구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정치철학과 종교는 고대엔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이 성질은 현대에 와서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지배적 힘이 등장할 땐 언제나 그 지배를 정당화해줄 명분이나 변명거리가 함께 배포된다. 이것은 어떤 사회나 집단에 대한 지배 방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사회에나 의식을 바꾸거나 의식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교하게 구축된 의도가 내재한다. 이 의도는 미디어를 통해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강제로 배포된다. 과거나 지금이나 모든 지배는 중앙집권에서 출발하며 중앙집권을 지향한다. 권력 구조는 어떤 경우에도 해체적 의도를 갖지 않는다. 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최소단위가 바로 <가족>이다. 아비는 부부가 생존하는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권위의 전달자였다. 이것이 20세기 후반까지 우리 사회가 구축한 권력의 집행방식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우리는 가족의 권력 구조가 변화하는 게 아니라 해체되어 소멸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나는 나를 낳아주신 분들을 엄마 아부지라고 불렀다. <엄마-아부지>는 자상한 엄마, 엄한 아부지다. 엄마는 다가가기 쉬웠고 언제나 나를 환영했다. 아부지는 똑바로 보기는커녕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나에게 아부지는 공책이나 책을 살 때 <돈이 나오는 곳>으로, 세상에 대한 <의문에 대답을 주는 존재>,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엄한 존재>로 기억된다. 엄마하고 누워 얘기하다 아부지가 들어오면 벌떡 일어났다. 엄마한텐 “엄마아~”가 인사다. 즉, 엄마는 내게 어른 친구였고 아부지는 어른 선생이었다. 내게 엄한 엄마는 한 번 있었다. 늦게까지 놀다가 저녁 시간이 한참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온 3형제를 불러놓고 낯선 눈빛으로 강태공 이야기를 했을 때를 제외하고 엄마는 늘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어떤 존재로 남아있었다. 아마 그때 엄마는 아부지가 집에 안 계셨기 때문에 아부지의 권위를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자식에게 <엄한 아빠>가 되기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엄한 아빠>가 되어야 할 이유는 뭐냐? <자상한 아빠>가 뭐가 어때서? 그거 구시대적 유물이야! 씹가부장제가 싸놓은 폐기물이라고! 라고 누군가 반발할 것 같다. 두 손 들었다. <자상한 아빠>해도 된다. 그러나 <자상한 아빠>는 좋은 아빠로 남을 수는 있으나 전통과 가치 전달자로서의 권위를 얻을 수 없다. 더 나쁜 것은 <자상한 아빠>는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자상한 아빠>였던 걸 후회하고 더 이상 <자상한 아빠>가 아닌 자신을 발견한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선배들은 그 후회를 경험했을지 모르겠다. <엄한 아빠>는 아주 잠깐 <자상한 아빠>가 될 수 있으나 <자상한 아빠>는 <엄한 아빠>가 되기 매우 어렵다. 왜 그런가?

자식을 살갑게 대하고 자식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자식을 망치지 않을진 모르지만, 삶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자식과 멀어지게 만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식과 부모의 정신적 단절은 심화된다. 다 큰 자식과 주거니 받거니 소주 한잔하고 사는 이야기하고 그러면 그게 부모로서 잘하는 일이다...이런 믿음이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식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자식과 멀어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모순된 결과가 빚어지는가? 아랫세대와 윗세대가 허물없이 지낸다는 건 두 세대가 마음을 열고 소통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아들은 항상 아부지가 보는 세상과 지가 보는 세상이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 아부지를 이해하고 아부지도 자기를 이해하니까 둘이 나란히 나아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나란히 나아가는 게 아니다. 30년 이상 늙어버린 아부지가 자식과 대화한다는 것은 대체로 30년 이상 밑으로 내려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의 눈높이로 내려온다. 부모가 밑으로 내려와서 과거에 젊었을 때의 자신에 비춰 자식의 마음과 소통하는 것이다. 자식이 30년을 미리 늙어본 다음 부모의 마음이 되어 나란히 아부지와 대화하는 게 아니다. 즉, 아부지가 눈높이를 아들에게 맞게 낮춰서 대화하는 게 살가운 자식 교육의 본질이지 자식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져서 아부지 눈높이로 대등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때 <자상한 아빠>는 자신이 내려간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능지수 130의 멍청한 자식은 아부지가 위치한 높이로 올라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아, 이 사람아, 그러면 그런 격차가 있다고 사실을 자식에게 말해주면 될 거 아니야. 자식이 바본가?”라고 누군가 반문할지 모른다.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렵다. 왜 그런가? <후천적 학습을 통한 이해의 원칙>에 반하기 때문이다.

<이해한다> 또는 <안다>는 게 뭔가? 매우 추상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는 길을 걷고 있다. 그때 나를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시선이 모인다. 그리곤 “여보! 어디 가?”하고 소리친다. 길에서 집사람을 만났다. 나는 많은 사람 중에서 집사람을 어떻게 알아봤을까? 머리 모양, 얼굴 생김새, 체형, 걸음걸이, 옷, 신발과 같은 집사람의 외형적 특징에 관한 정보가 이미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인식 행위>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외부에서 수집된 정보의 일치를 가리킨다. 내가 모르는 정보, 즉 처음 접하는 정보가 계속해서 입력되면 대게 학습자는 집중력을 잃어버린다. 많은 사람 중에서 한 사람(집사람)으로 주의가 집중되지 않는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대상(정보)이 아니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은 집사람과 비슷한데 너무 뚱뚱하다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지나갈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없는, 내가 관련 정보를 갖지 않은, 대상을 나는 알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자상한 아빠>가 아무리 아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전달해줘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아들은 그 경험에 대해 가진 정보가 없으므로 주의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것을 중요한 정보로 저장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아빠가 중요하다고 얘기했잖아!” “아빠가 중요하다고 한 건 기억이 나는데 무슨 얘기를 한 건지는....” 이렇게 된다.

그래서 살갑고 스스럼없이 자식을 대하면 겉보기엔 화목하고 좋은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늙으면 괴리감이 커진다. 자식은 아부지가 꼭 지 마음같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부모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다. 자식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그동안 얼마나 다가가려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부모의 마음은 더 상처를 받게 될 수 있다. 자식과 손자를 엄하게 키우는 것, 할배나 아부지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했는데 내가 그걸 하려고 하면 낯설고 어렵다. <엄한 아부지>는 말이 없는 아부지도 아니고 자식을 때리는 아부지도 아니며 일궈놓은 재산이 많은 아부지도 아니다.

그렇다면 <엄하다>는 게 뭔가? 부모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자식에게 전달되어 자식의 생각과 행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아부지는 <엄한 아부지>다. 자식이 아부지의 말을 흘려듣는다면, 그 아부지는 <자상한 아빠>이고 자식이 아부지의 말을 귀담아듣는다면 그 아부지는 아주 높은 확률로 <엄한 아부지>다. 같이 피자 시켜 먹던 아부지가 갑자기 엄한 아부지로 변하면 자식이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대개 그런 경우, 자식은 주변의 눈치를 본다. 주변은 엄마다. “엄마, 요새 아빠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40대 가장의 가정이라면 이 정도 수준으로 내려온 집들이 많을 것이다. 자식과 부모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고민했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세상엔 많은 할배들과 아부지들이 있는데, 왜 우리 할배와 아부지는 엄한 길을 선택했는가 또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왜 자식과 손자를 안아주고 뽀뽀해주기보다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을까? 분명히 손자들이 이뻤을 텐데, 왜 그 손자들을 한 번도 안아주지 않은 것인가? 그렇게 하는 조상들을 나는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게 궁금했다. 내가 할배라면 손자 손녀들 이뻐서 안아주고 뽀뽀하고 업어주고 과자 사주고 그랬을 텐데, 우리 할배하고 아부지는 내가 밉지도 않은데 왜 저리 마이 나무라고 야단만 치는가.... 나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할배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 아부지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있었다. 현재만 바라보면 이뻐하는 게 맞다. 그러나 손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순간 단두대의 칼날처럼 무언가가 그 이뻐해 주고 싶은 욕망을 잘라버린다. “표현을 속으로 해야지 겉으로 하면 자식을 망친다.”는 말 속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자식에서부터 올바르게 성장한 자식에까지 이르는 긴 시간이 전제되어 있다.

고깔모자 쓰고 딸의 생일날 케익을 사서 축하해주는 아빠가 있다. 결혼식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있다. 단오가 언제인지 뭐 하는 날인지는 몰라도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남편이 있고, 발렌타인데이 초코렛을 사는 아내가 있고, 화이트데이 사탕을 사는 남편이 있다. 여기엔 <옛것>을 버리고 받아들인 <새것>이 있고, 사랑은 마음껏 표현해야 사랑이라는 강박이 있다. 아부지가 아들 생일 축하해주면 자상하고 가정에 충실한 아빠라는 믿음이 있다. 생일, 뭔가를 받는 날이다. 선물도 받고 사랑도 받는다. 내 생일날 전화한 아부지가 있었다. 나는 그날이 내 생일인지 몰랐다. 새벽에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아부지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했다. “설날에 내려올 때 니는 큰집에 들리지 마고 고마 바로 내려온나.” 이게 전부였다.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나는 그날이 내 생일이라는 걸 알았고, 저녁이 되어서야 아부지가 왜 전화를 하셨는지 알았다. 아부지는 전화기에 대고 “미역국이라도 먹어라.”는 말을 못 하셨다. 왜 전화를 했는지는 내가 알아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부지한테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생일이 누가 나한테 전화 안 하나 기다리는 날이 아니라 엄마 아부지가 나를 낳아주신 날이라는 걸 알았다. 아부지도 나도 입으로는 차마 말을 못했다. 그날 나는 생일이 뭘 받는 게 아니라 줘야 하는 날이라는 걸 알았다. <자상한 아빠>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식이 정신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 아빠다. 자식이 의문을 품고 다가가려고 노력하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다가와 버리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쁨을 많이 받은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장애물을 마주칠 기회로부터 면제받은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날 위험이 있다. 과거엔 가정 내에 머물러있던 <응석받이>들은 “이노무 자슥, 너거 아부지 누구로?”와 숱하게 마주치면서 교정될 기회가 있었다. 이 기회가 사라진 지금 <응석받이>들은 무방비 상태의 사회로 나가 온갖 궤변과 유해한 행위를 양산해내는 준범죄자로 성장하고 있다. 자식은 자라서 부모에게서 독립한다. 그러나 <자상한 아빠>로부터 자란 아이들은 부모를 수평적으로 공유할 대상으로 볼 뿐, 자기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배우고 전수받아야 할 대상으로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다. 부모에게서 권위를 목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상한 아빠>들은 그 이름과 무관하게 가치의 전승을 매우 힘겨워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부모들이 된다.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동서로 다시 갈라서고,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눠지고, 학생과 선생이 갈라지고, 시댁과 친정으로 나눠지고, 남녀가 분열하고, 마지막으로 가정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증거는 <텅 빈 놀이터>를 보면 된다. 이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합쳐지려는 노력은 사회적으로 거부된다. 물질의 끝은 원자다. 공동체의 끝은 개인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지점까지 우리는 쪼개졌다. 선생이 학생을 훈계하고 가르칠 수 없고, 동네 어른이 아이들을 꾸짖을 수 없고, 아부지가 자식에게 가치를 전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우리가 헛 것을 보고 쫓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나눈 정치적 영향이 던져준 이미지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진보한 것이라고 믿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기독교의 신을 숭배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의심하지 않았고, 양복을 입고 양변기에 싸고 양옥집에 살고 양식을 먹는 것을 본받아야 할 것으로 인식했다. 내꺼 아닌 건 다 추구해야 할 가치였다. 그래서 내꺼 다 허물고 내꺼 다 내주고 남의 것으로 갈아탄 지금, 어떤가?

자식에게 조상으로부터 배운 걸 온전히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아부지는 할배로부터 받은 걸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식들에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나를 <자상한 아빠> 1세대라고 정의한다. 중요한 것은 이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안 것은 40대 후반이었으나 이게 괜찮은 거라고 생각한 것은 20대였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 나는 “단지 자상한 아빠가 되는 게 뭔 대수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식에게 내가 걸어온 길을 이야기해주고 싶은 욕망이 일었을 때, 그게 잘 안된다는 걸 알았다. 난 유능한 선생이었다.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선 도가 텄다. 그러나 <엄한 아부지>는 자식이 다가올 기회를 주는 아부지지 자식에게 전체부터 세부까지 가르치는 아부지가 아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에게 내가 아는 것을 누구보다 잘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그렇게 노력을 해도, 우리 집 아이와 나 사이에 난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대륙에서 갈라져 나온 섬이 다시 작은 섬으로 나뉘는 것과 같다.

아프고, 외롭고, 기쁘고, 좋은 건 내 몸뚱이 하나, 나 하나가 그런 것일 수 없다. 아무리 기분 좋은 일이 있어도 내 자식이 불행하면 내가 좋을 수 없고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엄마 아부지가 가난하면 내가 맛난 거 못 먹는다. 그러나 개인화된 세상은 아프면 니가 아픈 거고 내가 아픈 거 아닌 세상이다. 서서히 아프면 그냥 내가 아픈 것이 되고, 고민에 휩싸이면 나만이 고민에 휩싸인다. 형제가 없는, 동료가 없는 세상이다. 적의 원형은 <낯선 자>다. 개인은 곧 <낯선 자>들을 가리킨다. 나는 먼 조상에서 부모를 거쳐 내 밑에 자식을 매달고 대롱대롱 우주 공간에 흔들리는 끙가린데 끙가리는 끊어지면 더 이상 끈이 아니다. 이어져 있어야 끈이다. 눈앞에 있다고 자식이 아니라 마음속에 들어와야 자식이다. 그래서 자식은 먹이고 입히고 재워줬다고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게 아니다. 가치를 자식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부모다. 산은 뭔가? 나무가 있는 땅,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산은 <할매, 할배가 잠들어 계신 곳>으로 존재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산은 <등산지>다. 그래서 변해버린 산들이 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거 민폐아닙니까?”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