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②
트럼프의 집권을 초래한 미국 공화정 250년사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7-06)
마쓰바라 히로유키松原宏之
1971년생. 히토쓰바시 대학 사회학부 졸업.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크루즈 캠퍼스 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교수.
『벌레 먹는 근대 ― 1910년대 사회 위생 운동과 미국의 정치 문화』『‘오늘’을 생각하는 미국사』 등의 저서가 있다
■ 공화정에 포섭되는 민주정
물론 이러한 서술은 일면적이기는 하다. 이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식민지 시기에는 재산과 특권을 배경으로 만사를 결정했던 소수의 명망가도 긴 독립 전쟁을 견디고, 이어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의 지지와 동의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아메리카 공화국은 민주적이어야만 했다. 비록 선거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의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 결과 공공 영역을 재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화정 관점에서 보자면, 이처럼 넓어진 정치 참여의 문호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질이 필요했다. 토지와 재산과 같은 확실한 기반 없이 공공선을 돌보는 일을 맡는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자립한 개인이어야 했다.
물론이라고 민주주의자들은 답했다. 비록 부자나 대농장주는 아닐지라도, 자신은 자립한 사람이라고. 작기는 해도 자영농으로 살아가고 있다. 독립 장인으로 자신의 공방도 가지고 있다. 비록 작은 상인일지라도, 밑바닥에서 스스로 일어서 자립한 사람이다. 지금은 도제나 점원일지라도, 언젠가는 독립할 자신 역시 어엿한 한 사람이다. 신분제 없는 미국에서 우리는 정당한 시민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립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영농은 경쟁에 휩쓸려 몰락할 수도 있었고, 장인들은 공장에 밀려날 수도 있었다. 남부 농민들은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쥔 대토지 소유자들과 자신들의 차이를 모를 수 없었다. 건국 뒤 30여 년이 지나 마침내 1820년대에 여러 주에서 백인 남성에게 보통 선거권을 부여했을 때, 새로 투표권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피고용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자유와 자립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유롭지 못하고 의존적이라고 여긴 사람들과의 대비가 중요했다. 타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자신의 거취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노예와 비교하면, 자신들은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미국 시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선주민과 이민에 비해, 자신들은 정상적인 미국인이었다. 피부양자(dependent)인 아내와 자녀를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자신들은 자립(independent)한 사람이었다.
이리하여 민주주의자들은 공화정에 포섭되어 갔다. 공화정이 제시한 자립한 시민상을 받아들이고, 미국 시민에게는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질이 있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시민적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립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발판으로 삼았다.
남부에서는 소농들이 대노예주들과의 연합을 선택했다. 가장이자 노예가 될 수 없는 자유민으로서, 대다수 백인 남성은 자신들을 대농장주들과 동격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북부에서도 자신의 힘으로 자립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동자들은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고, 곤경에 처한 이민자들을 음주와 부도덕을 이유로 배척했으며,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에도 냉담했다. 보통 선거권 확대 등 겉으로는 민주화가 진전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 미국 사회의 계층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특히 남부에서, 이 민주정과 공화정의 야합은, 소수의 대토지 소유자가 부와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과두정으로 변모해 갔다. 면화 플랜테이션이 확대되면서 대농장주의 경제력과 정치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소농들은 이 농장주들과의 연대를 선택했고, 동시에 노예를 지배하며 플랜테이션 체제를 유지했다. 자유민인 남성으로서 자신들도 동등한 시민이라고 자처하면서도, 남부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소수의 부유층이 장악한 과두정을 용인했던 것이다.
■ 과두정 지배의 발전
1861년에 시작된 남북 전쟁과 노예제 폐지는, 남부에 전형적이었던 공화정적․과두정적 질서를 과연 완전히 청산했을까? 역사가들은 회의적이다.
북부가 추진한 남부 점령 개혁은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노예제를 대신한 소작인 제도 아래의 삶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인종주의적 제도는 흑인들을 계속 남부 사회의 최하층에 묶어 두었다. 오히려 노예제 농장주들은 살아남았고, 새로운 남부에서도 정치․경제의 주도적 지위를 유지했다.
한층 주목해야 할 것은, 과두정의 미국 서부 진출이다. 서부 개척은 종종 독립 자영농과 자유로운 노동자의 세계로 묘사되지만, 실상은 달랐다. 서부 개발을 주도한 것은 남부 출신의 농장주와 동부 출신의 자본가였다. 광산 개발, 철도 건설, 금융과 유통 등 개발 인프라 정비, 선주민의 배제, 노동력의 대규모 조달에는 부유층의 막대한 자금뿐 아니라, 연방 정부의 토지 공여, 보조금 지급, 군사력 제공, 법․제도 정비와 같은 공적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이 광범위한 개발을 주도한 것은 한 줌도 안 되는 부유층이었으며, 그들은 개발의 과실을 독차지하면서 더욱 큰 힘을 키워 갔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준주(territory)에서 주(state)로 승격되어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갖게 되자, 이 과두정적 서부는 미국 전체를 무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한층 키워 갔다. 남부 여러 주와 연대하면서, 서부 여러 주는 연방 정부의 정책을 크게 좌우하게 되었다.
이 과두정의 세계에서, 한때 미국 민주정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상화되었던 농민과 카우보이의 힘은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남부와 중서부에서 이주해 온 그들은 출신지에서 형성된 인종주의와 젠더관을 서부로 옮겨 와, 선주민을 배척하고 이민 노동자를 차별하는 가운데 계층적인 미국인관을 한층 강화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을 핵심 가치로 하는 민주사회는 여기에서는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
■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대두
20세기 벽두, 커다란 전기를 맞았다. 과두정은 크게 후퇴하고, 뉴딜 체제로 불리는 리버럴 데모크라시 시대가 찾아왔다.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가 미약했고, 시장에 맡긴 경제는 주기적으로 파탄을 겪으며 실업과 빈곤을 낳았다. 게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산업의 대규모화는 노동 운동의 조직화를 촉진했다. 공장과 철도 같은 거대한 생산․유통 시스템이 노동자들에게 공통의 경험과 이해관계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공화정적 시민관을 수용해 온 사람들은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껏 자신들보다 더 낮은 계층 사람들과의 차이를 지렛대로 삼아 자신의 지위를 확인해 왔던 그들은, 이제는 노동자라는 공통의 입장에서 이의를 제기하며 정당정치에 참여할 발판까지 마련해 갔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총력전도 이러한 움직임을 뒤에서 떠받쳤다. 병사로, 또는 후방의 시민으로 국가에 동원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헌에 걸맞은 처우를 요구했다. 남성들, 여성들, 이민자들, 흑인들이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전후 이러한 움직임은 억압받았지만, 사회적 긴장은 계속 축적되었다.
그리고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이다. 1933년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 정권을 대신해 들어선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정권은 긴급 대출과 공공사업으로 당장의 위기를 수습하는 한편, 통화 통제는 물론 농업과 공업의 생산 조정과 가격 조정에까지 적극 개입했다. 누진 과세를 강화하는 한편, 노동 운동을 보호하고 사회 보장을 확충했다. 자유방임의 경제 체제 아래에서 부를 축적해 온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찬양해 온 산업 세계가 무너지고, 자신들의 활동에 정부가 개입하는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소련과 나치 독일의 세력 확장을 지켜보면서, 루스벨트 정권은 사회 정책과 사회 보장을 기축으로 하는 리버럴 데모크라시 체제를 선택했고,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모았다. 이에 과두정은 크게 후퇴했다. <3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