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③
트럼프의 집권을 초래한 미국 공화정 250년사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7-09)
마쓰바라 히로유키松原宏之
1971년생. 히토쓰바시 대학 사회학부 졸업.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크루즈 캠퍼스 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교수.
『벌레 먹는 근대 ― 1910년대 사회 위생 운동과 미국의 정치 문화』『‘오늘’을 생각하는 미국사』 등의 저서가 있다
■ 자본가들의 공화주의적인 분노 ― 재산권과 자유
대국적으로 보면 뉴딜 체제는 자본주의에 반드시 장애가 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가 적절한 규제를 담당하고, 사회복지 제도를 정비하며, 공공투자를 뒷받침하도록 하는 것은 경제의 순환과 안정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실제로 자본가들 가운데에도 뉴딜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선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기를 거치면서 산업계는 정부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해 갔다.
하지만 맹렬하게 반발하는 일군의 자본가도 있었다. 전미 제조업자협회에 모인 재계 인사들은 뉴딜을 경제적 자유주의를 파괴하는 정책으로 보았다. 듀퐁사를 화약 제조업체에서 종합 화학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레네 뒤퐁은, 미국이 “헌법이 보장한 자유”를 빼앗았다고 분노했다. 그는 “정권이 내세우는 ‘뉴딜’은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이제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단언하며,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정치사상사적으로 말하자면, 자본가들의 분노는 단순한 경제적 손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루스벨트가 ‘리버럴’을 내세운 데 맞서, 과두정 시대의 지배층이었던 그들은 스스로 ‘보수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건국 이념으로 되돌아간 뒤퐁의 논리를 따른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공화정의 핵심인 사유재산을 타인에게 침해받지 않을 권리였다.
보수파 자본가들에게 이는 아메리카 공화국의 근본 원리와 직결된 문제였다. 독립선언에서 말하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가, John Locke가 자연권으로 제시한 생명, 자유, 재산권을 바탕으로 삼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공화국의 책임 있는 시민은 확실한 재산에 기반을 두어야만, 누구의 지배나 간섭도 받지 않고 공공선에 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리버럴 데모크라시를 명분으로 민중이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은, 민주정이라는 다수의 전제가 공화정을 공격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례 없는 공격을 가능하게 한 것은, 뉴딜 체제 아래 정비된 정부 관료 기구와 이를 떠받치는 전문가 집단, 그리고 대학을 비롯한 리버럴 세력의 거점이었다. 보수파 자본가들의 처지에서 보면, 뉴딜 체제가 꾀한 것은 책임 있는 개인들로 이루어져야 할 아메리카 공화국에 큰 정부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자수성가한 인간(Self-Made Man)은 과두정 연합의 질서 아래에서 공화정적 덕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며, 노동자로서 집단을 이루는 것 역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노력과 성공의 증표로 인정되어야 할 경제적 풍요로움에 국가가 개입하는 따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 뿌려진 반격의 씨앗
물론 전미 제조업자협회에 모인 자본가들이 아무리 분노한다 해도, 대공황을 초래한 그들에 대한 신뢰는 1930년대와 1940년대를 거치며 크게 실추되었다. 1950년대 들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공화당에 정권을 되찾아 주었지만, 뉴딜 체제 자체는 유지되었다. 반공주의는 일정한 지지를 얻었지만, 뉴딜을 사회주의라며 거부하는 입장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 아래 경제는 호황을 이어 갔고, 그 풍요를 누리는 중간계층도 두꺼워졌다. 과두정 아래에서 주도권을 장악해 온 사람들은 반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에게 걸려 있었던 것은 미국을 이루는 근본 원리였다. 그것은 단순한 탐욕이나 권력욕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유층 나름의 공공선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원칙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변으로 밀려난 자본가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집요하게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뉴딜 체제 아래 결집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그 연대를 허물어야 했다. 공격의 표적은 그들의 인종적 차이와 젠더 규범, 종교와 도덕이었다. 예를 들어 리버럴 데모크라시 시대에도 인종 분리 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보수적인 남부는 유망한 거점이었다. 인종적 분열을 조장하는 쐐기를 박아, 민주당의 기반이었던 남부를 공화당의 확고한 지지 기반으로 바꾸어 놓았다. 급속히 성장하던 남서부의 새로운 공업지대에서 일자리를 찾은 보수적인 남부와 중서부 출신자들 역시 중요한 공략 대상이었다. 군수산업과 이를 뒷받침하는 첨단기술 산업에는 막대한 연방 보조금이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 운동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이들을 복음주의 교회를 중심으로 결집시키면서 보수주의자들의 두터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보수파 자본가들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보수주의의 씨앗을 뿌려 갔다. 한편으로는 라디오와 TV 같은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했다. 재정적 지원을 받은 복음주의 설교자와 기업 친화적인 평론가, 반공주의자들은 미디어를 통해 전국적인 지지 기반을 다져 갔다. 여기에 가정의 가치 옹호를 결합해 기독교적 미국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확산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사상의 전환도 꾀했다. 대학과 싱크 탱크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어 리버럴 세력에 맞설 연구자들을 육성하고, 법조계에도 인재를 공급했다. 공화당 우파에 대한 지원도 강화되었으며, 1964년 배리 골드워터의 대통령 선거 출마는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선거 운동은 남부의 백인층과 남서부 교외에서 성장한 새로운 보수주의자들, 복음주의 세력, 그리고 유력 자본가들을 결집해 새로운 공화당 우파의 기반을 형성했다.
더욱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극우 사상과 운동의 조직화였다. 1958년에 설립된 John Birch Society는 그 선구적 사례였다.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건 이 단체는 연방 정부의 확대 또한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외교 정책에서 공민권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안을 미국 내부로부터의 침략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서 제시된 것은 단순한 정책상의 견해차가 아니었다. 뉴딜 체제 자체를 불신하고, 이에 맞서는 시민 조직을 구축하려는 구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조류들이 상호 관계가 없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의 분단, 부유층의 자금 제공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조직화, 그리고 극우 운동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좀 더 과격한 주장과 행동이 존재함으로써, 온건한 보수주의는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선택지로 제시되고, 정치 언설의 전체적인 중심은 우경화되어 갔다. 뉴딜 체제하에서 일단은 후퇴한 과두정적 힘은 수면 아래서 재편되어, 이윽고 공식적으로 복귀하기 위한 기반을 정비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때는 왔다. 1970년대 미국의 침체와 함께, 뉴딜 체제는 해체되어 간다. 현대 미국의 시작이다.
■ 전환기로서의 포스트 1970년대
지나온 250년의 역사에 비춰 보면, 오늘날 미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민주정․공화정․과두정의 길항 관계를 염두에 두고 정리해 보자.
미국을 민주정의 나라로 보는 신화는 일단 제쳐 두자.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공화정의 우위와 재산권의 중요성이었다. 재산이 있어야 자립과 자유가 가능하며, 공공선도 대국적인 견지에서 논할 수 있다. 재산도 없이 국정에 관여하려 한다면, 적어도 자립과 자유를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다. 공화정 사상은 이렇게 요구하며 민주정 세력을 집어삼켜 왔다.
노예와 흑인, 이민자, 여성과 자신을 대비시킴으로써 자신의 자립과 자유를 증명하려 했던 백인 남성들은 공화정적 계층 질서를 내면화했다. 이것이 미국 민주정이 안고 있는 병폐였다. 한편, 부유함에 대한 찬양은 부의 무제한 추구를 정당화했다. 노예제에 기반한 면화 산업과 서부의 대규모 개발을 통해 과두정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권력의 집중이 일어났다. 이것이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공화정․과두정 우위의 미국 역사 제1기였다.
우리가 미국 역사의 제1기를 망각하는 것은, 이후 찾아온 리버럴 데모크라시 시대의 영향 아래 지금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막강했던 과두정의 지배는 크게 흔들렸고, 뉴딜 체제가 들어섰다. 모든 것을 개인의 자조 노력에 맡기지 않는 사회복지 제도가 도입되었다. 사회의 최하층에 머물도록 강요받아 온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회적 지위를 높일 발판을 얻었고, 민주정의 실질도 한층 강화되었다. 또한 그동안 방임되어 온 경제 활동에도 일정한 규제가 도입되었다. 이것이 리버럴 데모크라시였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는 서방 사회를 떠받치는 두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보수파 자본가들은 재기를 노렸지만, 그들의 정치 운동은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이 새로운 균형의 시대가 미국 역사 제2기였다.
이러한 관점을 좀 더 밀고 나가면, 1970년대부터는 제2기의 균형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경기 침체라는 상황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보수파 자본가들과 광범위한 운동 네트워크는 맹렬하게 공세를 강화했다. 뉴딜 체제의 전성기에는 비주류에 머물렀던 운동이 마침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버럴 데모크라시는 후퇴하고, 과두정의 복권이 추진되는 미국 역사 제3기로 접어든다.<4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