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외롭게 싸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②
100년 전, 일본에서 국가 권력에 저항한 무정부주의자의 투쟁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8-07)
모리 마유미森まゆみ
1954년생. 작가이자 시민운동가.
저서에 『오가이의 언덕』『이치요의 사계』『센다기의 소세키』『고집불통의 사람―하니 모토코와 그 시대―』『‘세이토’의 모험―여성들이 모여 잡지를 만든다는 것―』『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시키의 소리』등이 있다.
■ 조선의 가네코 후미코
“조선에 있던 아버지 쪽 할머니가 내가 사는 마을로 찾아왔다”라고 후미코는 썼다. 1912년의 일이다. 아버지 사에키 후미카즈의 여동생 가메가 조선의 이와시타 게이자부로에게 시집을 갔고, 할머니 무쓰는 후미코를 조선으로 데려갔다. 이와시타 집안에 대를 이을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후미코를 양녀로 삼으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이리하여 후미코는 9살부터 14살까지 햇수로 6년, 일본 식민지였던 조선의 부강(芙江)에서 자란다. 예쁜 기모노를 입혀 주고, 여학교와 여자 대학까지 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어땠을까.
나는 그 자취를 따라, 벌써 스무 해도 더 전에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일본과 한국을 바다로 오가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좇는 여행이었다. (졸저 『바다는 당신의 길』, 2003년). 그곳은 대전에서 서북쪽으로 20킬로 정도 떨어진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였다. 쌀과 담배를 재배하는 농촌이었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해 식민지로 삼았다. 이와시타 게이자부로는 그곳에서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 보수 일을 하며 푼돈을 모았고, 뒤이어 고리대금업으로 전업해 산기슭에 저택을 마련했다.
그곳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거주하는 지역이었지만, 두 민족은 서로 융화하지 못했다. 조선인의 행정을 담당하는 면사무소와 일본인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1914년 일본인 거주자는 72호 350명이었다. 여관, 잡화점, 문방구, 의원, 우체국, 이발소, 묘포, 과자점, 게다 가게, 목수, 보통학교 교사, 헌병, 농민, 갈보집, 역원, 철도 인부 등이 있었다고 후미코는 쓰고 있다.
우리는 먼저 면사무소로 갔다. 해 질 녘이었지만, 친절한 직원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모르지만, 박열은 모두 알고 있었다. 후미코가 다녔던 부강 소학교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곳까지 차로 앞장서 안내해 주었다. 역과 나란히 금강이 흐르고, 그 맞은편에는 부용봉이 우뚝 솟아 있는 경치 좋은 곳이다. 학교는 지금은 2층짜리 깔끔한 건물로 바뀌었고,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학교에서 후미코의 성적은 재봉과 도화를 제외하면 모두 갑, 곧 우수였다. 그리고 교사 핫토리 토미에(服部富枝)와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따뜻한 엽서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움과 기쁨, 그리고 당시를 떠올리며 밀려오는 슬픔에 가슴이 찢어질 듯합니다.” 후미코는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양녀로 들이기는커녕, 후미코는 이와시타 집안에서 하녀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이와시타 집안은 돈벌이 외에는 관심이 없는 고리대금업자였고, 아편 밀매까지 손을 댔다. 후미코는 이곳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차별, 일본인 사회 내부의 차별, 그리고 가정에서 자신이 겪는 차별이 뒤얽힌 복잡한 현실과 마주했다. 교사는 “농민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농민은 생명의 부모다”라고 했고, 할머니는 “가난한 집 아이들과 밖에서 놀아서는 안 된다. 옷이 닳는다”라고 했다. 후미코는 혼란스러웠다. 혈육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물에 빠져 죽거나 철도에 뛰어들어 죽을 생각까지 했다.
면사무소 직원은 “후미코를 기억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면장을 지낸 분입니다”라며 박창규 씨 댁으로 데려가 주었다. 그 집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일본인이 귀환한 뒤, 그대로 살고 있는 거야.” 당시 아흔세 살이던 박창규 씨는 말했다. “나는 1909년생으로, 후미코는 나보다 한참 손위였지. 학교는 나는 옆의 조선인 학교에 다녔지만, 함께 걸어간 적도 있었어.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나를 무척 예뻐해 주었지.” 후미코는 이곳에서 고등소학교까지 다녔으니, 연대로 보아도 맞아떨어진다.
“이곳에서 유명했던 일본인은 이와시타와 에모토(江本)였어요. 에모토는 역 근처에서 여관을 했지요. 우리 아버지는 한방 의사였지만, 나는 학교를 졸업하자 텅스텐 광산에서 일했습니다. 그 무렵 쌀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부족했고, 광산에서 일하면 먹을 것이 나왔고, 술과 설탕도 구할 수 있었어요. 그 뒤에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후미코가 살았던 곳으로 가시죠.”
박 씨는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집은 흰 문주가 서 있고, 넓은 정원에 나무와 돌을 잘 배치한 멋진 집이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사들여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원만은 예전 그대로입니다”라고 박 씨는 말했다.
가네코 후미코가 조선에서 보낸 시간은 7년 남짓이었지만, 자서전에서는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만큼 후미코를 형성한 중요한 시기였다. 겹겹이 얽힌 차별, 그리고 친족의 학대를 받던 후미코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조선 사람들. 헌병 파출소에서는 “카키색 군복을 입은 헌병이 조선인을 마당으로 끌어내 옷을 강제로 벗긴 뒤, 맨살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후려치고 있는” 장면도 목격했다. “그래, 나처럼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복수해야 한다.”
■ 도쿄로 ― 만남과 성장
1919년 4월 12일, 후미코는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귀국하는 길에 올랐다. 이와시타 집안에서는 다른 여성을 양녀로 삼기로 하여, 후미코는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물론 후미코도 이와시타 집안에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아버지 사에키 후미카즈는 “네가 조선에서 쫓겨난 건 당연해. 조선이 나쁜 게 아니야. 다 네 잘못이야. 건방지고, 고집불통에, 심성까지 비뚤어졌잖아”라고 했다. 바로 그 시대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귀국하여, 후미코는 어머니의 친정인 야마나시의 가네코 집에 겨우 도착했다. 촌장(庄屋)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던 아버지 쪽 사에키 집안 사람들과 달리, 농가였던 가네코 집안에는 그런 권위주의가 없었다. 후미코를 따듯하게 맞이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가네코 집안에도 집안 식구들 간의 갈등이 있었고, 후미코에게는 도쿄로 나가 공부하고 싶다는 향학열이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후미코는 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1920년, 후미코는 열일곱의 나이로 홀로 도쿄로 향했다. 같은 무렵, 같은 나이의 같은 이름을 가진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가 있었다. 그녀는 친부에게 버림받은 뒤, 어머니와 어머니의 내연 관계인 젊은 남자를 따라 지쿠호(筑豊) 탄광 마을 등을 행상으로 떠돌아다녔고, 학교도 전전했다. 후미코의 어머니는 기쿠노, 하야시 후미코의 어머니는 기쿠였다. 두 사람 모두 남자관계가 문란했고, 남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적어도 하야시 후미코는 어머니와 그 남자에게 사랑받으며 평생 돈독한 유대를 이어갔다.
후미코는 미노와에 있는 작은 외할아버지 구보타 가메타로(窪田亀太郎) 집에 몸을 의탁하고, 우에노의 신문 판매점에서 일했다. 오전 중에는 간다의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겐수가쿠칸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저녁이면 우에노 미하시에서 한밤중까지 “석간이요!”하고 외치며 석간신문을 가판에서 팔고, 가게로 돌아와 다음 날 밥을 지을 쌀을 씻는 고된 생활을 이어갔다. 당시에는 후미코와 같은 고학생이 도쿄에 많이 있었다.
공부해서 여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치르고, 도쿄 여자 의학 전문학교를 나와 여의사가 된다는 것이 당시 후미코의 꿈이었다. 아무런 뒷받침도 없는 10대 여성이 도쿄의 밑바닥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데, 이것은 처절하면서도 무모한 꿈이었다.
미하시에는 지금도 같은 이름의 일본식 디저트 가게가 있다. 우에노 히로코지의 번화가였던 이곳에서는 당시 여러 주의자가 거리에서 팸플릿을 팔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미코도 그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가루비누 행상, 식모, 오뎅집 여급을 전전했다. 후미코가 살았던 곳은 유시마 신하나마치와 혼고 오이와케초 등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집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은 하야시 후미코가 살았던 생활권과도 겹친다. 당시 혼고구에는 대학이 있었고, 학생과 문사, 시인, 화가, 사회주의자 등이 많이 살았다. 그곳에서는 중요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여성만 놓고 보더라도 후미코는 다지마 히데(사회운동가, 중의원 의원), 구쓰미 후사코(사회운동가, 사회주의자) ― 좋은 인상을 받지는 않았던 듯하지만―, 니야마 하쓰요 등을 만났다. 그러한 만남 속에서 후미코는 자신이 지금까지 품어 온 차별받는다는 감정과 반항심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자신이 겪은 부조리가 무엇인지를 사회주의 사상이 밝혀 주고, 앞으로 가야 할 길까지 보여 준다고 느꼈다.
“나는 이제야 분명히 깨달았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고학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말하는 훌륭한 사람만큼 하찮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자서전』) <3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