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과 석유와 암(癌)의 회랑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8-20)
모치즈키 히로키望月優大
뉴욕 거주. 프리랜서 작가.
2월 중순,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를 방문했다. 북부 미네소타주의 원류에서 발원해 4,000킬로미터 가까이 흘러 멕시코만으로 들어가는 미시시피강 하구에 있는 도시로, 구불구불한 큰 강을 따라 형성된 지형 때문에 ‘크레센트시티(Crescent City, 초승달 도시)’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때마침 이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니발인 ‘뉴올리언스 마르디 그라’ 기간과 겹쳤다. (Mardi Gras는 프랑스어로 ‘기름진 화요일’이라는 뜻으로, 금욕 기간인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즐기는 축제다. 화려한 퍼레이드와 가면, 보라색․금색․초록색 장식이 대표적인 특징이다―역주). 미국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도시 전체가 보라색과 초록색,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퍼레이드가 지나는 길은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바쿠스’와 ‘아이리스’ 같은 유서 깊은 마르디 그라 퍼레이드 단체인 크루가 장식 차량 위에서 던지는 갖가지 기념품―형형색색의 구슬 목걸이와 플라스틱 컵 등―을 받으려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두 손을 뻗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멕시코만의 석유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2주 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고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전 세계의 유조선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4월 17일)에 따르면, “본래 중동의 원유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로 값싸게 운반하기 위해 개발된” VLCC라는 대형 유조선 대부분이 대체 조달처를 찾아 항로를 바꾸어, 동남아시아의 믈라카 해협이나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 멕시코만으로 향하는 대열을 이루었다고 한다.
■ 초승달 도시의 역사
18세기 전반,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할 무렵 ‘La Nouvelle-Orléans’(뉴올리언스)는 오늘날 캐나다 일부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 속해 있었다. 이후 18세기 후반에는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 서부가 한동안 스페인령이 되었다가, 19세기 초 다시 프랑스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803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유럽에서 벌이는 대규모 전쟁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루이지애나 전체를 1,500만 달러에 미국에 팔았다. 현지에는 선주민과 이주민, 흑인 노예를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살아보지도 않고, 멀리서 정략을 꾸미는 정치가들은 주민들의 의사 따위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뉴올리언스가 자랑하는 수많은 요리는 이처럼 여러 겹으로 쌓인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 채소와 해산물, 고기 등을 푹 끓인 뒤, 서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오크라와 필레 파우더(file powder, 선주민인 촉토족이 사용하던 향신료―역주)를 넣어 걸쭉하게 만든 수프를 밥과 함께 먹는 ‘검보(gumbo)’는 크레올 요리를 대표한다. 그 복합적인 맛에는 아프리카와 카리브해의 섬들, 유럽과 선주민의 음식 문화가 녹아들어 있다. 역시 쌀로 만드는 ‘잠발라야’는 일본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도 인기 있는 요리로, 스페인의 파에야 등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튀긴 빵처럼 생긴 ‘베녜’는 흰 가루 설탕을 듬뿍 뿌려 먹는 음식으로, 프랑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인디언 전쟁(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벌인 식민지 전쟁) 때 오늘날 캐나다 동부의 아카디아 지방에서 쫓겨난 프랑스계 아카디아인들―훗날 케이준이라 불린 사람들―과 함께 루이지애나 식민지에 전해졌다고 한다. 검보와 잠발라야에는 향신료 맛이 한층 강한 케이준식도 있다.
베녜와 치커리를 넣은 카페오레로 유명한 ‘카페 뒤 몽드’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구시가지인 ‘프렌치쿼터’(이름과 달리 스페인 통치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 많다―역주)에서 문을 열었다. 지금도 같은 자리에 초록색과 흰색 줄무늬 차양이 눈에 띄는 매장이 있으며,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인근 거리에서는 재즈와 R&B,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이 거리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카페 바로 옆, 세인트루이스 대성당을 마주 보는 계단식 광장에는 족히 백 명이 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똑같은 검은 티셔츠 차림으로, 경쾌하고 빠른 박자의 밴드 연주에 맞춰 몸을 흔들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플랜테이션에서
“이 일대가 이른바 ‘암 회랑(Cancer Alley)’입니다.”
뉴올리언스를 출발한 버스가 흐린 하늘 아래 펼쳐진 습지대를 지나 서쪽으로 한 시간가량 달렸을 무렵이었다. 미시시피강을 가로지르는 그래머시 브리지(Gramercy Bridge) 위에서 남성 가이드가 주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날은 아침 8시에 호텔을 나와 노예제의 역사를 전하는 ‘휘트니 플랜테이션’(Whitney Plantation)행 셔틀버스를 탔다. 이번 뉴올리언스 방문의 주목적이었다. 승객은 나 말고도 스무 명가량 있었다. 흑인 노예를 혹사했던 플랜테이션의 역사와 오늘날 이 일대가 ‘암 회랑’으로 불리는 현실 사이에는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깊은 연관이 있다.
‘암 회랑’이란 20세기 이후 미시시피강을 따라 들어선 석유 화학 공장 밀집 지대에 붙은 통칭이다. 뉴올리언스 인근에서 북서쪽으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주도 배턴루지 부근까지 이어진다. 환경오염으로 암을 비롯한 건강상 위험이 크다고 여겨져, 우라늄 채굴지나 핵 실험장 등과 더불어 이른바 ‘희생 지역(sacrifice zone)’의 하나로 거론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흑인 주민의 비율이 높은 곳으로, 환경오염과 인종 차별이 중첩된 지역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오는 일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 통치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미시시피강 연안에 개간한 농지에서 쪽풀(인디고)을 재배했으나, 미국령으로 넘어갈 무렵부터 사탕수수 재배로 전환되었다. 미시시피강의 수상 운송은 설탕 생산과 유통이 발전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적 배경으로는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생도밍그(오늘날의 아이티)에서 흑인 노예들이 봉기한 아이티 혁명(1791~1804년)도 간과할 수 없다. 식민지의 대규모 설탕 플랜테이션은 프랑스에 막대한 부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자 흑인 노예들이 집단으로 탈출하면서 설탕 생산은 급감했다. 농장주 가운데는 전란을 피해 흑인 노예들을 데리고 뉴올리언스로 건너온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티 혁명(1791~1804년):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흑인 노예들이 봉기하여 노예제를 폐지하고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혁명. 그 결과 1804년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인 아이티가 수립되었다 ―역주.
아이티가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으로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804년, 흑인 혁명이 미국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연방 의회는 해외에서 루이지애나로 노예를 들여오는 것을 금지했다(미국 전역에서 해외 노예무역이 금지된 것은 1808년이다). 영국에 맞서 독립 혁명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은 미국은 자국 안에서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계와 억압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다리를 건넌 버스는 참나무 가로수길과 노예를 소유했던 농장주의 호화로운 흰색 저택으로 유명한 ‘오크앨리 플랜테이션’(Oak Alley Plantation) 앞에 멈춰 서서 승객 몇 명을 먼저 내려 주었다.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결혼식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주변에는 역사적인 플랜테이션이 여러 곳 보존되어 있으며, 인근의 ‘펠리시티 플랜테이션’(Felicity Plantation)은 영화 『노예 12년』(12 Years a Slave)의 촬영지로도 쓰였다.
가이드의 이런 설명을 들으며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예제의 역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휘트니 플랜테이션을 알게 된 것은 작가이자 시인인 클린트 스미스(Clint Smith)의 저서 『How the Word Is Passed』를 통해서였다.
접수처에서 오디오 가이드 기기를 받아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노예를 소유했던 농장주의 ‘빅 하우스’를 비롯해 감독관의 집과 노예 오두막, 사탕수수즙을 졸이던 커다란 가마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명예의 벽’(Wall of Honor)이라 불리는 가로로 긴 석비에는 1752년부터 1865년까지 이곳에서 노예로 살았던 350여 명의 이름과 추정 출생 연도, 출신 민족(콩고족․수수족․이그보족 등)이 새겨져 있었다. 미국이나 카리브해의 섬들에서 태어난 사람도 많았으며, 자녀의 이름이 함께 기록된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보가 재산 목록이나 매매 기록 등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관람 동선의 끝자락에는 1811년 이 일대에서 일어난 ‘저먼 코스트 봉기’(German Coast Uprising) 기념 조형물이 기다리고 있다. 50점이 넘는 두상을 하나씩 가느다란 막대에 꽂아 세운 설치 작품으로, 조각가 우드로 내시(Woodrow Nash)가 제작했다. 당시 이 일대 여러 플랜테이션의 노예 약 500명이 자유를 요구하며 봉기했다. 그들은 뉴올리언스를 향해 진격하면서 사탕수수밭을 불태웠다. 아이티 혁명의 영향은 분명히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봉기에 나선 사람들 대부분은 군대나 민병대에 살해당하거나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그 뒤 목이 잘렸다고 한다.
■ 미시시피강의 이점
1865년에 끝난 남북전쟁도 흑인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노예 해방 뒤에도 농장에서의 고된 노동과 빈곤한 삶은 이어졌다. 루이지애나주는 열차 객차를 인종별로 분리하도록 법으로 규정했고, 그 합헌성을 둘러싼 소송이 1896년 연방대법원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Plessy v. Ferguson)로 이어졌다. 연방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를 계기로 각 주의 짐 크로법이 정당화되었고, 흑인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조치도 한층 강화되었다.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 흑인과 백인이 서로 다른 학교․열차․공공 시설을 이용하게 하더라도 양쪽 시설이 동등하면 인종 차별이 아니라는 원칙. 실제로는 흑인용 시설이 열악했으며, 인종 분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역주.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옛 플랜테이션의 광활한 토지와 팽창하는 석유 산업의 수요가 맞물리기 시작했다. 1901년 인근 텍사스주의 스핀들톱에서 원유가 솟구치면서 석유 붐이 일어났고, 루이지애나에서도 유전 개발이 활발해졌다.
급성장하던 석유 시장을 좌지우지한 스탠더드 오일은 배턴루지의 옛 면화 플랜테이션 터를 눈여겨보고, 1909년 그곳에 거대한 정유소를 건설했다(현재의 엑손모빌 석유 화학 플랜트). 이곳에서 생산된 석유 제품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올리언스를 지나 멕시코만으로 실려 나갔다. 행선지는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대도시와 세계 각지의 항구였다. 태평양전쟁 이전의 일본도 미국산 석유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1년 여름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뒤 대일 석유 금수 조치가 단행되자,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에 손을 뻗쳤다.
미시시피강의 역할은 수송로에 그치지 않았다. 석유 정제와 화학제품․플라스틱․합성 고무․비료 등의 생산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물을 공급했으며, 폐수 배출구로도 이용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이점’은 20세기 후반 들어 더 많은 기업을 끌어들였다. 기업들은 옛 플랜테이션 터를 잇달아 공장 부지로 변경했고, 이는 ‘암 회랑’이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다.
흑인이 주민의 과반을 차지하는 뉴올리언스를 비롯해, 루이지애나주는 전체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30%를 넘는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동등하게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민권운동의 성과로 1965년 투표권법이 제정되어 짐 크로법 아래의 투표권 제한이 법적으로 철폐된 뒤에도, 오랫동안 루이지애나주에서 선출된 연방 하원 의원은 모두 백인이었다.
짐 크로법(Jim Crow laws): 미국 남부 각 주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시행된 인종 분리 법규. 학교․교통․공공 시설 등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고 흑인의 투표권을 제한했다 ― 역주.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선거구에서 흑인 의원이 선출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가능해졌다. 게다가 사표가 많이 발생하는 소선거구제의 특성에 선거구 획정 문제인 게리맨더링까지 겹치면서, 전체 의석 가운데 흑인 의원에게 돌아가는 것은 단 한 석뿐인 구도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2024년 선거부터 도된 새로운 선거구 획정안이었다. 흑인 주민의 과소 대표를 바로잡기 위해 배턴루지에서 북서부의 슈리브포트까지 이어지는 가늘고 긴 선거구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 루이지애나주에 배정된 연방 하원 의원 6명 가운데 흑인 의원이 2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새 선거구 획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곧바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올해 4월, 연방대법원은 보수 성향 대법관 6명의 찬성으로 이 획정안이 헌법의 평등 보호 조항에 어긋나는 인종 게리맨더링이라고 판결했다.
뉴올리언스의 구시가지인 프렌치쿼터는 동쪽 끝이 미시시피강과 맞닿아 있다. 강변까지 걸어가면 강 건너 오른쪽으로 커다란 다리가 보인다. 뉴올리언스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크레센트시티 커넥션’(Crescent City Connection)으로, 두 개의 다리가 뉴올리언스와 맞은편 도시를 잇고 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다가오자, 뉴올리언스 전 시민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미처 도시를 떠나지 못한 많은 사람이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뒤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에서 빠져나가려고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려 했다. 당시 CBS의 시사 프로그램 「60분」에 따르면, 강 건너 그레트나의 경찰은 이들을 다리 위에서 가로막고 머리 위로 산탄총을 발사하며 돌아가게 했다. 경찰 대부분은 백인이었고, 피란민 대부분은 흑인이었다고 한다. (CBS 「60분」 보도)
세계와 이곳을 이어 온 강을 따라, 사람들은 줄곧 서로 갈라져 살아왔다. 세계는 이러한 분단과도 연결되어 있다.
(『세카이』, 202608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