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과 린든 존슨, 그리고 영화 『포레스트 검프』③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9-15)
아베 고다이阿部幸大
1987년생. 도쿄 대학 문학부 학사, 석사. 뉴욕 주립대학 박사 학위 취득. 쓰쿠바 대학 인문 사회계 조교, 미일 문화사 연구자.
『완전히 새로운 아카데믹 글쓰기 교과서』 『내러티브 피해학』 등의 저서가 있다.
■ 승리하는 Innocence
플레처의 사진이 촬영된 지 8년 뒤인 1972년, 베트남인 보도 사진가 닉 우트는 남베트남 짱방(盞盤)에서 네이팜탄 공격을 받은 마을을 빠져나와 알몸으로 달아나는 아홉 살 소녀를 촬영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이 사진은 통칭 「네이팜탄 소녀」로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소녀의 이름은 판 티 킴 푹이었다. 그는 14개월 동안 입원해 열일곱 차례 수술을 받은 끝에 목숨을 건졌고, 훗날 캐나다로 이주해 평화운동가로 활동했다.
(오랫동안 닉 우트가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온 이 사진에 대해, 2025년 세계 보도 사진 재단은 촬영자를 확정할 수 없다며 촬영자 표기를 ‘미상’으로 변경했다. 다만 AP통신은 자체 조사 뒤에도 닉 우트를 촬영자로 표기하고 있다. ― 역주)
1996년 킴 푹은 워싱턴의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에서 열린 행사에 초청되어 연설했다. 그곳에서 그는 백인 참전 군인 존 플러머를 만나 포옹했다. 전쟁 국가 미국의 폭력을 상징하던 아시아인 피해자는 사반세기가 흐른 뒤 미국의 ‘화해 서사’에 편입된 것이다.
미국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백인과 미국의 폭력을 용서하는 무고한 아시아 소녀. 쌍둥이 전쟁의 더블 아이콘을 하나로 묶은 서사가 이윽고 미국 영화사상 가장 사랑받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다. 『포레스트 검프』. 1986년에 출간된 윈스턴 그룸의 동명 소설을 각본가 에릭 로스가 대폭 각색한 작품으로, 로버트 저메키스가 감독한 영화는 앞서 본 ‘용서’의 의식과 거의 같은 시기인 1994년에 개봉했다.
존 웨인의 『그린베레』(1968년)를 비롯해 미국이 만든 유명한 베트남 전쟁 영화는 거의 모두 백인의,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서사다. 그러나 『포레스트 검프』는 ‘전쟁 영화’라는 틀을 훌쩍 넘어선 보편적인 휴먼 드라마로 사랑받았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인종과 전쟁이 폭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가장 교묘하게 은폐한 프로파간다 영화다.
이 영화가 백인의 폭력을 상쇄하는 서사임을 알아차리는 데 전문적인 해석은 필요하지 않다. 주인공 포레스트(톰 행크스)가 영화 첫머리에서 자신의 이름 ‘포레스트’가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의 초대 최고 지도자로 알려진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에서 유래했다고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포레스트는 이 이야기를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흑인 여성에게 들려준다.
포레스트는 지능 지수가 80에 미치지 못해 공립 초등학교 입학을 거부당한다. 그러나 이 낮은 지능은 작품 속에서 그의 순진무구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가 구조적 폭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는 면죄부로 작용한다. KKK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베트남 전쟁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흑인 여성이 이 이야기에 보이는 반응을 끝내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 자체의 입장 표명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포레스트는 지능이 낮을 뿐 아니라, 다리가 불편해 보조기를 착용하고 한부모가정에서 자라며 따돌림을 당하는 등 소수자적 속성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1950년대다. 당시 앨라배마에서는 대중교통, 특히 버스 좌석의 인종 분리가 중대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55년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이다. 그러나 영화는 통학버스에 빈자리가 있는데도 아무도 포레스트를 앉혀 주지 않는 장면을 통해, 구조적 인종차별의 문제를 백인 아이들 사이의 따돌림 문제로 치환한다.
물론 포레스트가 장애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1950년대 앨라배마의 ‘버스 좌석’으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의도적인 탈인종화의 몸짓이 된다. 사회적·역사적 폭력을 개인의 드라마로 환원하는 서사이며, 그 ‘개인’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백인이어야 한다.
버스에서 포레스트에게 유일하게 옆자리를 내주는 소녀는 그의 소꿉친구 제니다. 제니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로, 딸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들이 사는 낡아빠진 집은 ‘빈곤과의 전쟁’의 얼굴이 된 플레처의 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훗날 제니는 학생 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번번이 폭력적인 남자와 사귀고, 스트립 클럽에서 노래하고, 마약에 빠지고, 자살을 시도한다. 전형적인 트라우마 서사다.
제니의 ‘전락’하는 삶은 잇달아 큰 성공을 거두는 포레스트의 ‘상승’ 궤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포레스트에게 알리지 않은 채 그의 아이를 키우던 제니는 마지막에야 그와 결혼해 짧은 행복을 맛보고,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는다. 이때 영화는 관객에게 ‘제니가 포레스트를 더 일찍 선택했더라면’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 결과 제니의 운명은 사회복지의 실패가 아니라 잘못된 선택이 초래한 개인의 자기 책임 문제로 환원된다.
그렇다. 포레스트는 ‘그를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는 신과 같은 존재다. 실제로 그는 기적의 사나이다. 첫 번째 기적은 그의 다리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완전히 낫는 것이다. 낫는 데 그치지 않고, 뛰어난 달리기 능력은 이윽고 그의 정체성 자체가 된다. 존슨의 복지국가 정책이 끝내 이루지 못한 유색인종과 빈곤층, 장애인의 구제를 포레스트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을 통해 혼자서 실현해 버린다.
훗날 미국을 횡단하는 유명한 달리기 선수가 된 그의 뒤에는 수많은 ‘신자’가 따른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달리느냐고 묻는다. 평화를 위해서인가. 노숙인을 위해서인가. 여성의 권리나 환경보호, 동물의 권리를 위해서인가. 그러나 포레스트는 “그냥 달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모든 일이 성공한다. 이 영화에서 포레스트가 낮은 지능 때문에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무능의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만능의 조건이 된다.
대학을 졸업한 포레스트는 군 복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육군에 지원한다. 그러나 단순한 명령을 수행하는 데 타고난 적성을 지닌 그는 군대에서 곧 두각을 나타낸다. 미국 전쟁영화의 훈련 장면에서는 훈련교관이 신병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것이 정해진 공식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포레스트는 “군대에서 네 유일한 목적이 뭐냐”라는 질문에 “교관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해 “너는 IQ 160의 천재다”라는 극찬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것, 이해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그려진다. 그런 포레스트야말로 전쟁 국가 미국이 바라는 이상적인 군인이다. 그가 이해하는 유일한 것은 친구이자 전우인 흑인 버바(미켈티 윌리엄슨)를 돕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그 마음은 버바의 인종과 무관한 개인적 우정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포레스트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바로 그 설정은, 서사적 차원에서 흑인인 버바의 죽음이 인종 문제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면죄부로 작용한다.
베트남 전쟁 시퀀스(sequence)의 주요 인물은 버바와 댄 중위(게리 시니스)다. 두 사람 모두 포레스트에게 구출되지만, 흑인인 버바는 끝내 죽는다. 반면 백인인 댄은 살아남는다. 그는 자신이 전우들과 함께 명예롭게 죽었어야 한다. 그런데 포레스트가 구해 주는 바람에 두 다리를 잃은 몸으로 살아남았다며 도리어 포레스트를 원망한다.
이리하여 흑인은 스크린에서 퇴장하고, 두 다리를 잃은 백인 댄이 남는다. 댄은 포레스트를 원망하면서도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버바가 남긴 사업 구상을 바탕으로 포레스트가 시작한 새우잡이 사업에 동참하고, 포레스트와 함께 큰 부자가 된다. 끝까지 포레스트를 믿었기에 그 역시 구원받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포레스트의 결혼식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댄은 ‘마법의 다리(magic legs)’라 부르는 최첨단 의족을 착용하고 아시아인 약혼자를 데리고 나타난다. 아시아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그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과거와 화해한다.
마지막으로 포레스트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스포츠와 사업, 도덕과 전쟁에서 언제나 미국을 승리로 이끄는 존재다. 그러면서 승리라는 허구의 이면에 놓인 폭력을, 영화가 그의 지적 장애에 부여한 천진함으로 모두 무효로 만든다.
실제로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있으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영화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상처 입은 순진무구한 영혼이 한없이 상승해, 마침내 무적의 아버지로 살아남는 이야기다. 포레스트는 패배하고 상처 입은 미국에서 불리한 요소를 모두 지워 버리며 그 상처를 치유한다. 그런 신과 같은 인물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 국가 미국의 역사는 필시 평화 그 자체로 비칠 것이다.<끝>
(『세카이』, 202609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