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ink-madam&logNo=220798804907

10여 년 전에 <라스트 사무라이>란 영화를 재밌게 봤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명예와 헌신, 희생, 용기와 같은 군인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던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는
전쟁이 끝난 후 실용주의와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시대가 되면서 상실감을 느낀다.
이때 일본에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들어선 정부가 보수세력에 맞서 근대화를 추진하며 신식 군대 육성에 나선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건너간 알그렌 대위는 일본 정부의 눈에 들어 신식 군대 훈련을 맡았다가
개혁에 맞서는 보수파인 사무라이들과의 전투에 나선다.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사무라이의 포로가 된 알그렌 대위는 사무라이를 대표하는 가츠모토 영주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무라이 문화에 자신이 추구하던 명예와 헌신, 희생, 용기와 같은 군인정신이 있음을 알고
오히려 이들 문화에 동화된다. 그리고 무사가 되기 위한 혹독한 수련의 길을 걸으며 검술을 연마한다.

흔히 사무라이정신(혹은 무사도)은 일본을 대표하는 정신이자 일본인의 혼처럼 이야기된다.
사무라이나 사무라이정신을 칭송하는 역사, 소설, 회화, 영화, 애니가 곳곳에서 넘친다.
일제히 피어났다가 어느 순간 일제히 지는 벚꽃을 사무라이정신과 연관시키는가 하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사무라이 블루'로 부른다.
사무라이정신을 빼면 일본의 역사나 문화는 뭐 빠진 찐빵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무사)가 활개를 치던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사무라이정신 및 무사도란 단어나
이와 관련된 책이 넘치고 넘쳤을 것 같다.
차를 마시는 것은 다도, 검을 휘두르는 것은 검도, 바둑을 두는 것은 기도, 상대방 멱살 잡고 넘기는 것은 유도라고
부르면서 뭐 좀 할 때는 도(道)를 붙여 온갖 폼을 잡고 심오한 정신을 강조하는 일본인들이라면
일본 정신을 대표한다는 사무라이정신이나 무사도와 관련해선 옛 문헌들이 즐비할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도와 관련된 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899년이다.
그것도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였다. 저자는 기독교를 신앙하며 미국인 여자와 결혼했던 니토베 이나조.
책은 영어로 출판되었고, 서구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자 일본에서 역으로 이를 수입, 번역해 출판했다.
니토베 이나조가 썼다는 위의 <무사도>란 책을 보면 일본어로 번역한 번역자의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1899년이면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며 과거 일본의 신분제도를 없애버린 뒤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뒤로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군인이자 관료이자 지배층이었던 무사 계급을 없애버린 것은
물론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로 무사 계급은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 사라져야 할 과거의 악습이자 제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니토베 이나조가 (무사도, 일본의 정신)이란 책을 썼을 때는
일본이 청일전쟁 등에서 승리하며 서양에 대해 지녔던, 그리고 자기들의 과거 역사에 대해 지녔던 콤플렉스를
약간은 극복했을 때였다.
니토베 이나조가 서양의 기사도에 대응해 일본에도 무사도가 있으며 일본 나름의 고차원적인 정신과 문화와
윤리가 있다는 것을 웅변하기 위해 쓴 책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도쿄대학을 중퇴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잡다한 것을 공부한 뒤 다시 독일에서 농학, 경제학, 통계학 등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농학교 교수 등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런데 나는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란 책을 읽으며 혼란에 휩싸였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에 일본의 무사도와 관련된 숱한 일화와 옛 문헌들이 가득 언급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서양의 잡다한 철학이나 기사도, 유교, 선불교 등을 언급하며 자신의 개똥 철학을 읊조린 뒤
이런 게 일본에도 있었고, 그게 사무라이정신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무사도와 관련된 옛 일화나 문헌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간간이 한두 줄 언급될 뿐,
저자의 '썰'과 '개똥철학'이 2/3 이상은 차지하는 것 같다.

웃기는 이야기도 많다.
저자는 일본의 옛 무사들이 싸움터를 행진하다가도 화살통에서 붓을 꺼내 시를 짓곤 했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무사의 갑옷 안에선 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며,
이런 온화한 정신이야말로 일본 무사의 풍습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실례들은 거의 없다. 그냥 저자는 그렇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적장에게 멋진 시를 지어보낸 을지문덕도 사무라이고,
한삼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시를 지은 이순신장군도 사무라이라는 것일까?
아무튼 옛 무사들이 시도 짓는 온화한 정신의 멋쟁이 사무라이라고 해놓곤
다른 장에서는 한 평민이 무사의 등에 벼룩이 붙어 있다고 알려주자 무사가 그 평민을 칼로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슬그머니 무사의 명예와 자존심을 운운하면서 ......
일관성도 없이 무사와 관련해 좋은 이미지를 여기저기서 갖다붙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도 답답했나 보다.
관용, 인내, 용서 등의 높은 덕의 경지에 오른 무사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인정하는가 하면
무사의 명예나 일반적인 가르침을 기록해둔 텍스트가 하나도 없어서 아쉽다는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무라이정신이나 무사도가 있는 것 같은데 구체적인 자료나 실제적인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봉건제도를 유지하며 전국시대를 거치기도 했던 과거 일본에서 무사들의 충성은 강조되었다.
왜냐하면 무사들의 모든 것은 자신을 무사로 임명하고 먹고살 땅을 줬던 영주들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밉보이거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무사는 영주의 손에 바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었다.
거기에 땅(영지)이라도 몰수당하면 그날로 가문은 거지나 하인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나라나 임금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었던 것처럼 영주의 사병이었던 무사들은
천황이나 일본이 아니라 영주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저자는 어느 나라나 쌈박질을 하는 시대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무사도라는 종교를 창립한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 이야기, 신라의 관창 이야기, 계백 장군 이야기, 삼별초의 난, 사육신 이야기 등을 버무려서
며칠만 고생하면 나라도 과거 우리나라에 무사도가 있었다는 것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프론티어정신, 기사도, 자본주의정신, 기업가정신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가 외국에서 출간되었다가 크게 히트하자 번역되어 수입된 이후로
일본에선 군국주의가 득세하며 사무라이정신은 일본의 정신이자 혼으로 칭송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군국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침략을 도모하며 무사도라는 종교를 군인들에게 주입하고,
야마토 다마시(日本魂)로 칭송하기에 이른다.
심지어는 아래 사진처럼 전투기를 몰고 하늘을 나는 조종사들까지 일본도를 들고 폼을 잡게 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들은 정말로 사무라이정신으로 무장한 폼나는 전사들이었을까?
전투에서는 용감하지만 민간인이나 포로에는 관용을 베풀고,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멋진 시를 남기고,
사적인 욕망을 뒤로한 채 오로지 국가에 대한 충성만을 생각했던 멋진 군인들이었을까?
하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나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더 잘 알 테니 사족은 달지 않기로 한다.

대신 이 하나만 언급하기로 하자.
흔히 폭탄을 매단 비행기를 몰고 미군의 전함에 자살 공격했던 카미카제를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으로 미화하곤 한다.
카미카제 조종사들은 천황을 위해 사쿠라 꽃잎이 되어 사라져간 사무라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좌파 지식인도 아닌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 회장을 지내고 일본 우익의 거두로 불리는
와타나베 쓰네오의 고백은 이와 전혀 다르다.
쓰네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병으로 근무하며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는 조종사(카미카제 특공대)들이 두 다리를 떨며 서 있지도 못하는가 하면 일부는 바지에 오줌을 싸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지 않으려고 해서 강제로 태우기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리사 모리모토 감독이 카미카제에 대해 부정적인, 아니 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상영했을 때
오히려 관람객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냈고, 일부 일본인들은 감독을 찾아가
자신들은 오래 전부터 카미카제의 진실을 알았지만 용기가 없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나는 다수의 카미카제 조종사들이 겁쟁이였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청년들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을 이끌었던 전범들은 도쿄에서 재판을 받았다.
A급 전범 중에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살한 자도 있었지만 다수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목숨을 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는 목숨을 구걸하는가 하면 전쟁의 책임을 다른 지휘관들에게
덮어씌우기에 급급했다. 태평양전쟁을 지휘하며 군인들에게 사무라이정신을 주입했던 최고위급 전범들 중에서
정작 사무라이정신을 가진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더보기 : [서소문 포럼] 일본의 ‘무사도 정신’ 은 뻥이다
-> mnews.joins.com/amparticle/4377327

*<국화와 칼>은 1946년에 출간.
패전국에 대한 악마화 작업이었다.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에 가본 적도 없다.
루스 베네딕트는 미국 정부의 위촉을 받고 <국화와 칼>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