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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쟁   문재인정부   천안함   세월호   최순실   검찰개혁   국방개혁   정치개혁   일반   전체 
+++ 참으로 훌륭한 분 +++
  번호 127021  글쓴이 진짜..  조회 334  누리 10 (105,115, 0:21:23)  등록일 2020-10-17 02:59 대문 0

참으로 훌륭한 분
진짜..
손양원 목사 일대기 김구 손종일 애양원 18장




특선: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심층전기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17

손양원 목사와 고신교회 I

기자명 나삼진 입력 2020.09.17 07:16 수정 2020.09.24 22:24 댓글 0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사역’과 고신교회

나삼진 목사(오렌지카운티 샬롬교회 목사, 행복한 교육목회연구소 소장)
손양원(1902-1950)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여 5년 이상 옥고를 치루었고, 해방과 함께 출옥 후 여수 애양원교회로 복귀해 목회를 계속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 때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교했으며,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 성자였다. 그는 1950년 9월 한국전쟁 초기에 자신도 순교함으로써 한국교회 역사상 최고의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전기 《사랑의 원자탄》은 1977년에 11판이 출간되었고, 미국, 영국, 독일, 태국, 네덜란드. 안도네시아 등에서 번역 출판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신앙인물로 소개되었다.

그는 해방 후 대표적인 부흥강사였는데,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함께 옥고를 치룬 한상동 목사의 옥중구상이었던 신학교 설립을 통한 목회자 양성을 이해하고, 1946년 9월 고려신학교 설립 당시 기성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설립자들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박형룡을 국내로 인도해 1947년 11월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했지만, 그는 한 학기 만에 고신을 떠나 상경하고 말았다. 이에 1948년 5월 박윤선의 교장 취임과 함께 손양원도 총무로 취임해 생애 마지막 2년 남짓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고려신학교를 위해 귀한 봉사를 했다.1) 한명동 목사는 그를 두고 “고려신학교의 초창기에 총무를 맡아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한부선 선교사, 박윤선 목사와 같이 오늘의 고려신학대학교의 기초를 닦은 역사적 인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2) 이 소론은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을 기념해 그의 신앙과 삶, 사역과 순교가 어떠했으며, 그가 고신교회 초기 영성과 경건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손양원의 성장과 신학과 목회
1) 성장기와 교육과 신학교육

손양원은 경남 함안군 칠원 출신으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에 충일한 아버지 손종일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칠원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장로가 된 아버지의 신앙양육을 받으며 자랐다.3) 칠원 지방의 31운동을 주도하였던 손종일이 체포되어 1년 동안 옥고를 치루면서 손양원은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그는 1919년 4월 서울중동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이듬해 아버지가 삼일운동으로 체포되면서 퇴학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고, 손종일이 출옥한 후 그의 권유로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신문 배달과 우유배달로 고학을 하며 동경 쓰가모중학교 야간부를 마쳤다.

경남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에 위치한 산돌 손양원 목사 생가와 기념관
1923년 귀국한 그는 정양순과 결혼하였고, 1926년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여 강사였던 왕대선, 예원배, 권임함, 안다손, 정덕생, 주기철, 최상림등의 가르침을 받고,4) 1929년에 졸업했다. 1925년 무렵부터 1935년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경남노회 부산시찰 구역 전도사로 밀양수산교회, 부산감만동교회, 남부민교회, 원동교회 등을 순회하며 돌보았거나 개척을 했다.5) 그 가운데 감만동교회는 한센병자들의 교회였다. 그는 1928년만해도 감만동, 하단, 초량, 수산, 칠원, 우봉교회 등을 순회하며 설교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6)

손양원은 1935년 4월 33세의 나이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을 준비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는 기간에 평양 능라도교회를 시무하였으며, 1938년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함에 따라, 신학교를 폐쇄하기로 해, 그해 졸업생들은 졸업식 없이 우편으로 졸업장을 받아야 했다. 그의 신학동기생들은 강신명, 계일승, 김양선, 박손혁, 이학인, 한정교 등이었다.

손양원은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1938년 5월 17일 제41회 경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7) 경남노회 순회강도사로 경남지역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목회자로서 수련을 받았다.8)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안수를 받지 못했는데, 차종순은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 사상에 심취하였다는 것과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고,9) 이상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교회를 어렵게 한다는 이유, 무교회주의에 대한 호의적 태도, 1939년 일본 경찰에 피첩됨으로 안수를 받을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고 있다.10) 손양원의 안수에 대해 손동희는 1939년 봄에 원가리 선교사에게서 안수를 받았고, 해방 후 문창교회에서 다시 안수를 받았다고 했다.11) 손양원은 목사 안수는 노회의 소관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보아 비공식적으로 안수를 받았을 가능성보다 원가리 선교사가 진정한 목사로 인정하고 축복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본 검찰의 조서에도 목사가 아니라 전도사로 나타난다.



3) 애양원교회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손양원은 1939년 7월 14일에 애양원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했다. 전임 김응규가 신사참배를 하였고,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할 수 없어 사임함에 따라, 신학교 동창이었던 벌교교회 김형모가 손양원을 교회에 추천해 후임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손양원이 신사참배를 반대해 경남노회 순회전도 사역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고, 애양원에는 당시 많게는 1,200명 이상의 환우들이 살고 있었는데, 교회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손양원이 참된 목사로 알고 그의 돌봄을 기뻐하였다.12) 손양원은 1939년 7월 6개월 동안 임시목사로 청빙을 받았지만 신임을 받아 계속 시무하였다.

애양원은 특수한 지역이라 덜 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됨에 따라 그는 설교를 통해 꾸준히 신사불참배를 주장하였고, 종말론적인 설교를 하였다.13) 소화 14년(1939) 11월 중순 “현하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라는 설교를 통해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고난을 이기고 신앙을 공고히 해야 하며, 순교정신으로 교역에 종사해야 할 것을 설교하였고, 소화 15년(1940) 4월 중순에도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라는 제목의 설교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것임을 믿으며 주의 강림을 기다리자는 설교를 하였다. 그가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한 기간이 오래지 않았으나, 그는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고통당하던 애양원교회 교인들에게 자주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설교를 하곤 했다.

손양원은 1940년 9월 25일 수요기도회 후 귀가한 후 여수경찰서 형사를 대동한 전남경찰부 가루배 형사에게 체포, 검속되었다.14) 그는 일제검속 후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1943년 5월 17일 만기출소를 해야 했지만,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소할 수 없었고, 이에 항고하였지만 석방할 경우 재범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하고 예방구금을 한 것이었다.15) 그는 다시 경기구금소를 거쳐 충주 감옥으로 옮겨져 해방 때까지 있었다.16)

손양원이 투옥된 후 그의 가족은 참으로 인고의 삶을 견뎌야 했다. 동인과 동신이는 학교 공부를 하지 못하고 부산의 통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얻은 월급의 대부분을 가족들의 생활비로 보내었다.17)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할 때는 동인이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징집을 거부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동희와 동장은 고아원에서 생활해야 했다.18) 손양원은 투옥해 있던 기간에 자주 자녀들과 아버지,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신앙을 격려하였다.19)


4) 해방 후의 사역과 순교

1945년 8월 해방 후 충주감옥에서 출옥과 함께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가 목회하였다. 그는 1946년 2월 경남노회 제47회 정기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았다. 제47회 정기노회는 1945년 12월 3일 오후 7시에 시작하여 5일까지 부산진교회당에서, 이듬해 1946년 2월 19일부터 20일 밤까지 마산교회에서 속회되었다. 노회 촬요에 손순열, 손양원, 이성언, 김봉갑 4인의 목사 임직 보고를 하고 있는데, 손동희가 마산문창교회에서 안수받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2월 19일 혹은 20일에 임직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 경남노회 소속으로 있었다. 그는 제51회 노회(1949. 3)에 총회 부총대로 선출되었고, 이명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제53회 노회(1950. 3)에는 목사 명부에서 이름이 빠져 있음을 볼 때 한국전쟁 직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20)

1948년 10월에는 여수순천사건이 발발해 21일에 그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하였다. 그 일은 손양원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으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았고, 한동안 그를 부흥회에 동행시키기도 했으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켜 성경을 공부하게 하기도 했다.

손양원은 당시 문제가 되었던 국기경례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다. 1949년 한국기독교계가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그는 4월 17일까지 서울에서 집회를 하며 여러 차례 대통령 면담의 기회를 엿보았고, 대통령 면담이 이루어져 교계의 뜻을 전달하였다. 1950년 3월 경남법통노회에서 국기배례가 아니라 주목하도록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고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21)

손양원은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 갈 수 있었지만 교회를 지키다가 체포되었고, 1950년 8월 하순 율촌분주서 소장과 인민군에 의해 끌려 율촌분주소를 거쳐 다음 날 여수내주소로 호송되어 갔고, 창고에 갇혀 있다가 9월 28일 순천으로 호송되던 중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미평 뒷산 과수원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7세였고, 그가 순교당하던 날 막내가 태어났다.


미주

1)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6, 87.
2) 한명동, “추천의 말”,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서울: 아가페, 1995.
3) 이현찬, 《칠원교회 100년사》, 함안: 대한예수교장로회 칠원교회, 2009. 250-261.
4) 〈경남로회 제22회 로회록〉 (1927. 7. 5-9, 동래수안예배당), 66. 김승태, “손양원의 초기 목회활동과 신사참배 거부항쟁”,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4호, 2011. 220.
5) 차종순, 《애양원과 사랑의 성자 손양원》, 29.
6) 김승태, 앞의 글, 220-223.
7) 〈제41회 경남노회 촬요〉, 1938. 5. 17-19, 동래 해운대교회당.
8) 이상규, “해방 후 손양원의 생애와 활동”, 《해방 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397.
9) 차종순, 앞의 책, 31-32.
10) 이상규, 앞의 글, 397-398.
11)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5, 60.
12) 애양원교회 김수남 권사의 증언, 차종순, 앞의 책, 33.
13) 손양원 체형조서, 28. 김승태, “손양원의 초기 목회활동과 신사참배 거부항쟁”,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4호(2011), 243.
14) 안용준, 《사랑의 원자탄》, 서울: 성광문화사, 1977. 69.
15) 재판부의 결정문, 손동희, 앞의 책, 134-135.
16) 안용준, 앞의 책, 72.
17)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5.
18) 손동희, 앞의 책, 148-164.
19) 그의 옥중편지는 손동희 편,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목회》, 이광일 편, 《손양원 목사 옥중서신》등으로 엮어졌다.
20) 경남노회 제52회 촬요(1949. 9.), 제53회 촬요(1950. 3.). 안용준, 앞의 책, 544.
21) 〈경남노회 제53회 촬요〉.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87

손양원 목사와 고신교회Ⅱ

기자명 나심진 입력 2020.09.24 22:17 수정 2020.09.25 06:46 댓글 0
손양원과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

나삼진 목사(오렌지카운티 샬롬교회 목사, 행복한 교육목회연구소 소장)

2. 손양원과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

고신교회는 한상동, 주남선 등의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이로 인해 투옥된 것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시원은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 설립에서 시작된다. 손양원은 한상동, 주남선 등과 함께 고려신학교 기성회에 참여해 신학교 설립에 동역기 시작했다. 허순길은 손양원이 “박윤선 목사의 교장 취임식과 함께 고려신학교의 총무로 봉사를 시작했다”고 했다.22) 남영환은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을 하고 있는데, “손양원 목사가 남장로교회가 경영하는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순천노회와 선교사의 유혹과 압력을 받으면서도 고신운동에 앞장선 것은 자신의 힘도 있었지만, 애양원교회가 손목사의 신앙에 절대순종했던 데도 가능했다”고 했다.24) 이상규는 그러한 “손양원에게 고려신학교 총무라는 직을 부여했으나 총무라는 이름에 합당한 일을 한 일이 없”으며, “손양원 목사가 고려신학교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해 왔다는 허순길 교수의 언급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인 표현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손양원은 고신교회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았는가?


1) 손양원과 고려신학교 동역

먼저, 손양원은 고려신학교 설립기성회로 참여했고, 2년 후에는 고려신학교 총무로 수고했다. 그가 한상동과 주남선과 같이 옥중에서 신학교육을 꿈꾸지는 않았지만, 한국교회의 쇄신을 위해 지도자의 중요성을 잘 알아, 고려신학교 설립에 함께 했다.

설립자들은 고신의 모든 재정을 지출하면서까지 송상석을 통해 박형룡을 귀국시켰지만, 그는 4대 장로교회 선교부의 지원으로 신학교육을 하기 위해 한 학기 만에 서울로 떠났다. 이에 박윤선의 2대 교장으로 취임과 때를 같이하여 고려신학교 총무로 취임하였다. 이는 그가 고신을 지지하고 있었고, 부흥회를 전국적으로 인도하여 명성이 있었던 데다가, 두 아들이 순교한 후 원수를 용서하고 아들로 삼았던 후라 집회 초청이 급증하였다. 고신은 기성회원이었던 그를 총무로 모셨는데, 목회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한 봉사였다. 심군식은 손양원의 전기에서 “손 목사는 부흥회 인도 외에도 자주 부산에 내려갔다. 부산에서 시작된 고려신학교 총무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출옥성도 주남선, 한상동 목사들과 함께 고려신학교 육성을 위해 손 목사는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라 기술한다.25) 한상동과 주남선의 전기를 쓴 작가로서 고신 초기의 역사를 해박했던 심군식이 두 설립자의 자료를 오랫동안 수집하며 그들과 오랫동안 대화했던 그의 기록을 가볍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오병세는 필자와의 대화에서 그 총무의 역할을 이사회의 총무로 실무 책임을 지고, 신학교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홍보대사와 같은 역할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손양원은 고려신학교의 정기간행물 〈파수군〉에 여러 차례 설교를 기고하며 고려신학교를 지지하고 협력했다. 그는 순교이전 〈파수군〉에 모두 네 편의 설교를 실었고, 순교 후에도 발국, 개제한 설교가 네 편 더 나타난다. 그 무렵 〈파수군〉의 편집인 안용준 교수가 손양원의 설교와 서신을 발굴하고 알리는 데 앞장섰는데, 존경받았던 그의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그만큼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손양원이 순교한 후 안용준은 그의 설교 ‘신앙과 생활’을 시로 쓰기도 했다.26) 그가 수집한 손양원의 재판기록과 일기와 편지가 엮어져 2부작 《사랑의 원자탄》이 출간되었다. 〈파수군〉에 게재된 손양원의 설교는 다음과 같다.

표1_ 〈파수군〉에 게재된 손양원의 설교

번호 제목 게제 호수 내용
1 성경대로 살자(1) 제4호, 7-11
2 성경대로 살자(2) 제5호, 7-9
3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제6호, 31-34 주기철 순교기념예배 설교
4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 10호, 6-12
5구주의 성탄을 맞이하는 나의 감사 58호, 25-27
6나의 감사 68호, 22-25
7부활 주님의 5대 특은 73호, 15-22
8설교초: 추수의 감사 123호, 15-17


2) 손양원과 고려신학교 재정적 후원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후 손양원은 애양원교회 성도들과 함께 재정적인 협력을 했다. 고려신학교 초기 헌금자 방명록에는 손양원과 애양원교회 성도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명단은 김태권(500원), 보육원 선생(400원), 차종석(2,000원), 송재국(1200원), 서인순(1,200원), 강두례(1,200원), 정○임(1,000원), 김철연(400원), 박봉이(100원), 박상준(500원), 이은재(300원), 이끗순(300원)등이었고,27) 김진수(500원), 안인라(1,000원), 김윤심(1,000원), 정명남(700원) 등은 일시금이었던 것으로 보아 작정헌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28) 또 그는 개인적으로 1949년 1월 11일자로 3,000원을 헌금하였고, 7월 7일에는 강두례(1,000원), 차종석(2,000원) 두 사람도 헌금했는데,29) 손양원이 고려신학교 총무로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거나, 그 수행이 제한적이고 정신적인 후원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30) 손양원은 고려신학교 설립 기성회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고, 그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지지한 것을 본받아 애양원교회 성도들과 병원의 직원까지 고려신학교를 위한 헌금에 동참했던 것이다.


3) 손양원과 한국교회 쇄신운동 변증

손양원은 고려신학교와 총회가 갈등하고 있을 때, 고려신학교 일원으로서 ‘고신당국자들의 선서문’ 발표에 참여했다. 1949년 9월에 발표된 이 문서는 ‘호소와 공약선언: 대한예수교장노회 총회와 각 노회와 성도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문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한명동, 손양원, 송상석 등 고려신학교의 핵심인물 여섯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된 글이다. 해방 후 첫 경남노회에서 출옥성도 주남선을 노회장에 선출하고 이어 고려신학교를 인가하는 등 교회 쇄신을 도모했으나, 친일세력들에 의해 이듬해 뒤집어지고 말았다. 이에 교회와 평신도들이 강력히 항의하고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면서, 김길창 등 친일교권주의자들이 경남노회를 분리시켰다. 총회전권위원회는 노회를 분리해 나간 이들을 책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경남노회가 고신을 중심하여 이교파를 수립한다라는 억설과 중상적 허위선전”을 시작되면서,31) 제52회 노회 결의로 문서를 발표하기로 하였다.32) 이 문서에서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가 이교파 수립을 계획한 일이 없음을 일곱 가지로 선언하고, “총회파에서 고려신학을 잘라 내친다 해도 우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준수하고 나갈 것”이며, 고신책임자들은 전권위원이나 상회의 잘못을 항의하는 것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33)

이 문서가 나온 것은 제35회 총회(1949. 4. 23, 새문안교회)에서 경남노회 문제 처리를 위한 전권위원회를 파송하였고, 전권위원들은 총회가 부여하지 않은 권한으로 1949년 6월 21일 각각 극소수가 참여하여 경남노회를 경남노회, 경서노회, 경중노회로 분할하고 그 결과를 통지하면서 ‘이교파와 이교파 지지자들의 모략과 선전에 속지 마시오’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당시 총회전권위원들은 총회와 갈등하는 경남노회를 분할해 쉬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경남노회의 대표성을 갖고 총회 지도부와 관계가 깊은 김길창 목사 일파가 3월에 노회를 분리하여 이탈해 나간 시점이었다. 경남노회로서는 총회전권위원회가 교권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그 권한을 남용하여 경남노회로서는 그 처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고, 반대파에서는 ‘이교파 수립’이라는 소문을 내기 시작, 전권위원회가 이를 공개적으로 공시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이후 고신총로회가 조직된 1952년까지 3년 이상 경남노회가 총회의 외면과 박해가운데서 총회에 항의하고 투쟁하면서 고신이 이교파 수립을 목표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고려신학교 총무로서 손양원도 동참했던 것이다.

이렇게 손양원은 고신교회 설립자들과 오랫동안 동역했고, 신앙적인 깊은 유대감을 가졌으며, 고려신학교 설립과 육성에 함께 동역하였다. 총회와 경남노회간의 갈등으로 이와 유사한 형태의 성명서가 고신이 총회에서 단절되기까지 몇 차례 더 나왔지만, 손양원이 순교한 후라 함께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순교하지 않았다면 고신의 입장과 함께 했을 것이고, 1951년 고신이 총회로부터 단절되고, 1952년 총로회가 발회될 때 그가 고신교회에 동참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것은 손양원의 순교 후 총회측에 속한 애양원교회를 떠나 고신을 지지하는 성광교회를 개척하여 고신에 머문 정양순의 한결같은 입장이나, 막내딸 손동연도 애양원교회와 손양원 삼부자의 묘소를 통합측 역사유적으로 독점하는 것을 불편하게 보고 있는 것은 그같은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양원은 교파에 치우쳐 사역하지 않았다.34)


4) 손양원과 고신교회와 두 아들의 순교

손양원은 고신교회의 설립자들과 깊은 유대와 교류가 있었다. 이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피의자 심문조서에 의하면 증인 이모, 금모씨의 심문조서에서 그들은 손양원이 주장하는 교리는 당시 부산에서 최상림, 한상동, 주남서, 윤술용 등의 주장하는 교리론과 동알한 신앙심이라 대답하고 있다.35)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같은 신앙과 같은 경건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평소 고려신학교와 그와 함께 하는 교회나 성도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사역했다. 부산지방 청년신앙운동에서 1949년에 한부선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년신앙운동에 참여하였던 미군 병사가 헌금한 100달러로 요한복음 소책자를 가지고 시내 5만호에 축호전도를 하였고, 마지막에는 손양원을 강사로 부흥전도집회를 가졌다.36) 이같은 일은 이듬해에도 있었다. 손양원은 그의 일기에서 그 집회에 대해 4만호에 복음을 전하고, 500여 명의 결신이 있었으며, 3천 명이 전체집회에 회집하는 역사가 있었다고 적고, 이를 “아내와 애양원교회 교우의 기도와 부산고려신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의 기도의 열매로만 믿고 나는 더욱 신께 감사드렸다.”37)

그리고, 여수순천사건으로 그의 두 아들이 1948년 10월 21일에 순교했을 때, 애양원교회는 이인재를 강사로 부흥회중이었다. 이인재는 해방 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다니던 신학생으로서 평양과 경남을 왕래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경남의 한상동과 평안도의 주기철과 이기선을 연결했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인재는 동인과 동신의 장례식을 집례하고 설교하였다. 이인재는 두 아들을 잃고 상심하였던 정양순을 위로하여 회복하게 했고, 상심한 손양원에게는 순교를 갈망했던 자신들 대신 순교한 두 아들의 순교자의 영광을 언급하며 그의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38)


5) 마지막 가던 길과 순교의 기림

손양원의 장례식은 고려신학교에서 주관했는데, 이는 손양원이 생애 마지막까지 고신교회와 어떤 관계를 가졌던가를 잘 보여준다. 손양원 목사 순교 후 장례식은 보름만인 10월 13일에 엄수되었다. 장례식이 이렇게 늦었던 것은 여수 지역의 치안 문제와 함께 고려신학교 인사들이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손양원의 순교 후 소식이 고려신학교에 알려졌고, 장례 일정이 10월 13일로 정해짐에 따라 박윤선과 오종덕, 학생과 여성도등 30여 명이 함께 10월 10일 부산 부두에서 여수로 향하였다. 이들은 여수 부두에 내려 미평까지 30리 거리를 손양원의 순교자의 길을 생각하며 걸어서 갔다.39)

손양원의 장례식은 노회 대표가 아니라 고려고등성경학교장 오종덕이 사회를 보고 박윤선이 ‘순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으며, 애양원 성가대와 고려신학교 학생들이 각각 특별찬송을 불렀으며, 애양원 대표, 노회 대표, 기독신문사 대표가 조사를 하였다.40) 목사가 별세하면 노회가 장례식을 주관하는 것이 통상의 관례이고, 또 손양원과 나덕환이 절친한 관계였지만, 손양원 장례식은 노회 관계자나 나덕환이 아니라 고려신학교 인사들이 장례식을 집례한 것이었다.

나아가, 손동인과 동신이 순교했을 때나, 손양원이 순교한 후 그들을 기리고 이념화하는 작업은 고신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애양원교회 집회를 인도하면서 동인, 동신의 순교를 보고 장례식을 집례했던 이인재는 “학창에 매친 십자가의 두 열매”를 〈파수군〉 창간호에 기고하여 전국교회에 알렸다.41) 또 고려신학교가 중심이 되어 동인,동신을 기념하는 ‘인신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그들의 순교를 기렸다. 고신교회의 기관지 〈파수군〉 제10호에서는 손양원의 순교 1주년을 맞이하여 표지에 그의 사진을 싣고, 순교 직전에 남긴 미발표 설교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을 특집으로 준비했고, ‘손양원 목사 입옥시문’을 함께 실었다.42) 이후 계속하여 손양원의 옥중서신을 비롯하여 다양한 글을 개제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였다. 안용준은 손양원 목사의 옥중편지나 심문조서를 정리하여 〈파수군〉에 발표하였고, 이를 엮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그의 전기를 펴냈다. 파수군에 개제된 손양원 관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표_2 파수군에 게재된 손양원 목사 관련 기록
번호 제목 게제지 비고
1 그의 신앙과 생활 7호, 20-22
1 흘러간 옛 꿈 8호, 22-27
2 흘러간 옛 꿈 (2) 9호, 28-31
3 손 목사님의 입옥 시문 10호, 20-25
4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13호, 27-38
5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2) 14호, 16-22
6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3) 17호, 22-28
7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4) 19호, 23-31
8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5) 20호, 17-27
9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6) 21호, 27-35
10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7) 22호, 21-29
11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1) 64호, 66-75
12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2) 65호, 54-68
13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3) 67호, 56-66
14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4) 68호, 60-68
15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5-2) 74호, 59-68
16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7) 75호, 65-


6) 순교 후 남은 가족들

손양원이 순교한 후 총회측에 속한 부목사가 애양원교회의 담임이 되면서 남장로교 선교부의 영향을 받는 교회는 손양원과 신앙적인 입장을 달리했다. 그리하여 정양순은 손양원과 고려파 신앙을 잇기 위해 1952년 이후 성암교회가 설립되었다.43) 그로 인해 교회에서 나오던 생활비까지 끊어지게 되었고, 자녀들은 교육과 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처절하게 생존해야 했다. 정양순은 성암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한상동의 소개장을 가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모금에 나섰으며, 3년만에 교회당이 건축될 수 있었고, 그때 정양순으로부터 훈련받은 이들이 다수가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잘 섬기도 있다.44)

손양원이 순교한 후 유족들의 삶은 힘겹고 고달팠다. 자녀들이 다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문제가 당면과제였다. 안용준이 중심이 되어 대한기독교순교자유가족원호회를 조직하여 순교자 유가족을 돕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고신교회가 중심이 되어 시작했기 때문에 총회파의 협력을 받는 것이 어려웠다.45) 당시의 교회들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기념사업으로 나오는 헌금이 조금씩 전달되었지만, 생활비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46) 다행히 손동희는 음악선교사 마두원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울 수 잇었고, 한명동의 소개로 부산남교회 성도 가정에서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생활하였으며, 명향식이 피아노를 마련해 주어 세 자매는 밤낮으로 연습해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47) 손동연은 경희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손동희는 당시 총신을 다니다가 고신으로 옮겨와 3년을 공부하고 교단적인 갈등 가운데서 학부를 마치지 못했는데, 고신대학교 개교 50주년 때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손동희의 아들 박유신은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손양원의 신앙유산을 잇고 있다.(계속)

미주
22)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1996. 87.
23) 남영환, 《한국교회와 교단: 고신교단사를 중심으로》, 서울: 소망사, 1988. 352.
24) 이상규,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서울: 생명의 양식, 2016. 334-335.
25) 심군식,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생애》, 서울: 영문. 1994, 32.
26) 안용준은 손양원이 남긴 수필을 시체로 만들었다. 〈파수군〉 1950년 7월호, 21.
27) 《고려신학교 설립 찬조원 방명록》. 부산: 고려신학교, 1946.
28) 서인순과 강두례는 1948년에 각각 1,000원을 헌금한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고려신학교 회계록(1946-1948)》에는 강두례(1,000원), 차종석(2,000원)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강두례는 최소 3회 3,200원, 차종석은 최소 2회 4,000원을 헌금하였다.
29) 이상규, “손양원 목사와 고려신학교”,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335.
30) 이상규는 1946년 개교 초기의 자료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상규,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334, 335.
31) “호소와 공약선언: 대한예수교장노회 총회와 각 성도들에게 드리는 말씀”, 1949. 9.
32) 〈경남노회 제52회 촬요〉(1949. 9.).
33) 〈고신당국자들의 선서문〉 2면, 1949. 9.
34) 안용준, 앞의 책, 544.
35) 안용준, 앞의 책, 541.
36) 《학생신앙운동 20년사》. 18-19. 이상규, 나삼진외,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 학생신앙운동사》, 서울: SFC, 2013.
37) 손양원의 1949년 6월 3일 일기. 안용준, 앞의 책, 364.
38) 손동희, 앞의 책, 237-238.
39) 심군식, 앞의 책. 109.
40) 손동희, 앞의 책, 330. 심군식, 앞의 책, 108.
41) 이인재, “학창에 매친 십자가의 두 열매”, 〈파수군〉 창간호(1948년 12월), 27-32.
42) 〈파수군〉 제10호(1951년 10월호), 6-12, 20-25.
43) 신풍교회 홈페이지, “교회 역사”, http://pkist.net/s/; 손동희, 앞의 책, 338-339.
44) 손동연, 《결국엔 사랑》, 서울: 헤럴드북스, 2018. 176, 188.
45) 안용준, 앞의 책, 550.
46) 손동희, 앞의 책. 338.
47) 손동희, 앞의 책, 339-340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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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 순교 70주기 기념 좌담회, 〈기독교보〉, 2020. 5. 30.
“경남노회 제27회 정기노회 촬요”, 1945. 12.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촬요(26회-6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연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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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agoragen.com/?p=5993(2020년 1월 17일 출력)
www.pkist.net/s/(신풍교회 홈페이지)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935

손양원 목사와 고신교회 Ⅲ

기자명 나삼진 입력 2020.10.04 07:20 댓글 0

손양원이 고신교회에 남긴 영성

손양원 목사 흉상


나삼진 목사(오렌지카운티 샬롬교회 목사, 행복한 교육목회연구소 소장)
4. 손양원이 고신교회에 남긴 영성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은 한국 기독교가 낳은 최고의 인물이고, 세계교회에 내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순교 70주년에 손양원 삼부자의 순교만 찬양할 일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피하지 않았고, 그토록 사랑하고 심령의 변화를 기대하며 피를 토하듯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한국교회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의 순교 70주년을 맞이해 그가 남긴 영성을 고신교회와 한국교회가 배우고 따르고 그의 경건과 영성을 체화하여 새롭게 되어야 한다. 그가 남긴 신앙의 유산이 무엇인가?


1)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순교에의 열망

손양원은 하나님의 계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기 위해 5년 이상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어떠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고, 가족들에게 옥중에서도 자주 편지로 그들의 신앙과 삶을 격려했다. 이근삼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투옥된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적 배경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과 교회를 향한 사랑, 종말론적 기대와 그리스도 왕권에 대한 개인적 언약, 신적 진리에 대한 비타협적 증언과 교회와 국가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성, 순교에 대한 높은 평가와 하나님의 영광” 등 네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48)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순교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다가 세 부자가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 변화의 영성

손양원은 전도사 시절부터 순회전도자로 경남의 여러 지역 교회를 다니며 설교하였고, 많은 기록을 남겨두었다. 그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지룬 후 출옥성도로서 전국의 많은 교회의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두 아들 동인, 동신의 순교와 함께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 삼은 후에는 더욱 집회를 많이 다녀야 했다. 그는 해방 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변화를 중요하게 보고,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선포를 통해 개인의 마음의 변화를 이끌었다. 동인, 동신에 대한 마음의 부담 때문이었는지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였지만, 안재선을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진학시켜 공부하게 한 것도 그같은 이유에서였다. 한상동과 그는 같은 신앙과 정신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투옥되었던 출옥성도들이었지만, 한상동은 신학교육을 통해 신실한 목회자를 양성해 한국교회 쇄신을 도모하였고, 손양원은 전국적인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개인의 마음과 삶의 변화를 이끄는 소명에 충실했다. 그의 설교는 교회와 민족, 신앙과 삶을 아우르는 설교자, 성경중심의 보수주의 설교자, 작은 자를 섬기는 설교자, 감사의 모범을 보인 설교자, 기도하는 설교자, 종말론적 설교자로 특징지어진다.49) 그는 교파를 초월해 수많은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였고, 이를 통산할 때 애양원교회를 제외하고도 2천회 이상의 설교를 했을 정도였다.50)


3) 작은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헌신

손양원은 작은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헌신했다. 그가 살았던 1940년대와 50년대에 한센병자들은 ‘문둥병자’라 불리며 가정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이었고, 국가도 그들을 책임져 주지 못했다. 손양원은 초기부터 나환자들이 모인 감만동교회를 시무하며 이들을 목회하기 시작한 후, 애양원교회에서 목회하고 그곳에서 순교함으로써 그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한부선은 그가 나환자들의 교회에서 사역한 것이 고려교단이 빛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했다.

또 감사한 것은 고려신학교에서 일하시던 손양원 목사님이 나환자교회에서 일하신 자선 적 봉사는 고려교단이 빛나는데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된 것이었습니다. 손 목사님이 순 교한 후 나환자교회의 노회(성진노회)가 처음으로 고려파교회에 조직되었는데, 14교회와 주로 나환자 학생들을 위한 1개의 신학교가 있는 것입니다. 교단 내 30여 처의 고아원 중에서 마산 인애원과 부산 애린원은 초창기부터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여 교회가 던져준 빛과 밀접한 관계를 늘 나타낸 것입니다.51)

이 글은 고신교회 20주년을 맞아 역사화보를 간행할 때 찬사에서 손양원을 언급한 것인데, 미국정통장로교회 선교부는 오랫동안 성진노회가 중심이 된 교역자 양성기관 영광신학교를 지원, 운영한 바 있다. 손양원의 이러한 사랑 실천의 영향으로 고신교회가 규모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은자에 대한 관심이 활발했는데, 한센병자만 아니라 고아원과 양로원 사역으로 1970년대에 30여 개의 사회복지시설이 고신교회 안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국가가 버려진 아이들을 책임지지 못하던 시절, 고신교회 성도들은 이들을 돌보는 것을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본 것이었다. 인애원(조수옥), 희망원(이약신), 애리원(주경순), 성로원(한형세), 애린원(한정교), 소양(지득룡), 무궁애학원(박재석), 청학농예원(김순안, 박계두) 등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4) 용서와 화해의 영성

손양원이 갑작스럽게 두 아들을 잃고 난 후 좌절했지만, 때마침 애양원교회 집회를 와서 두 아들 장례식을 집례했던 같은 출옥성도 이인재의 격려로 회복하였다. 그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 안재선을 양자로 받아들였다. 손양원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용서하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인 것이었다.52) 청소년기의 손동희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아버지와 심한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손동희도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어 나덕환 목사를 통해 군 지휘관에 그 뜻을 전하여 안재선이 사형 집행 직전 풀려날 수 있었다. 손양원은 순교한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참석한 이들에게 답사를 통해 ‘아홉 가지 감사’를 발표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음으로써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용서와 화해의 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53) 손양원은 이미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5) 실천적인 사랑의 영성

손양원은 ‘사랑의 원자탄’이라 이름할 정도로 실천적인 사랑의 성자였다. 그가 순교하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은 순교를 찬하하였고, 고신교회의 많은 성도들도 손양원의 신앙과 삶을 보고 그의 길을 따르고자 했다. 박윤선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가 네덜란드 자유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시절, 가족들과 함께 국내에 있던 부인 김애련이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이 소식을 듣고 귀국한 박윤선은 어머니를 잃은 자녀들을 위로하기보다 먼저 한 일이 “음주 운전을 하여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자를 낸 미군에게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잃은 청소년기 자녀를 위로하고 배려하지 못한 것이어서 자녀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지만,54) 이는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던 손양원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이 고신교회 안에서 얼마나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랑의 원자탄》이 출간되자 기독교 서적 출판이 제한적이었을 때, 고등학생들까지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55) 당시 고신교회의 성도들은 손양원을 통해 이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땅에서도 실천할 수 있음을 배웠고, 그의 영향으로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체화할 수 있었다. 원수까지도 사랑한 손양원의 실천적 신앙은 그 시대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도 성경 속의 가르침이 아니라, 삶의 모범으로 비추어졌다.


맺는말

경남노회 소속이었던 손양원이 순천노회로 이명을 간 것이 언제였던가는 경남노회 촬요를 통해서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안용준과 손동희의 증언을 볼 때 1950년 순교 직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6) 그가 순교하였을 때는 고려신학교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 속해 있었고, 독립된 교단으로 형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총회파 순천노회 소속으로 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95회 총회(2010)는 애양원교회와 손양원 목사 삼부자 묘를 한국기독교 사적 제6호로 지정하였다. 지금 애양원교회도, 손양원과 두 아들의 무덤도 통합측 역사 유적에 등재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이다. 이후 그 관리에 문제가 생기면서 그의 유족들은 손양원의 유적과 신앙유산을 특정교단이 점유하고 있음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다.57)

손양원은 고신교회와 한국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신앙유산이다. 손양원의 모교회 칠원교회가 거금을 들여 생가를 사들이고, 정주채, 이만열 등이 중심이 되어 2010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오늘의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가 되었고,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이 이루어졌고, 그동안 여러 차례 학술강연회와 다양한 기념사업을 전개하며 손양원의 신앙과 삶을 드러내고 있다. 초대관장 안경선에 이어 지금은 손동희의 아들 박유신이 관장으로 있다.

지금까지 살핀 것과 같이 손양원의 신앙과 사상, 사역과 순교를 볼 때, 손양원은 고신의 아들이었고, 고신의 동지들과 함께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가, 고신의 품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졌던 인물이다. 그러나 손양원은 고신의 울타리에 제한될 수 없는 한국교회의 대표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고신교회를 넘어서 한국교회의 인물로 생각해야 한다는 이만열의 지적은 타당하다.58) 한국교회의 대사회신인도가 바닥에 이르고 있는 이때에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손양원을 배우고 닮아 그리스도인들이 곳곳에서 작은 손양원, 작은 예수로 살아갈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끝)

미주

48) 이근삼,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교회》, 서울: 생명의 양식, 2007. 180, 이근삼,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와의 대결》, 서울: 생명의 양식, 2008. 388-408.
49) 문성모, “손양원 목사의 설교”, 《한국교회 설교자 33인에게서 배우는 설교》, 서울: 두란노, 2012. 297-300.
50) 손동희, 앞의 책, 270.
51) 한부선, “찬사”, 《우리 교단의 어제와 오늘》, 1971.
52) 손동희, 앞의 책, 257-258.
53) 손동희, 앞의 책, 242.
54) 박혜련, 《목사의 딸》, 서울: 아가페북스, 2014, 69.
55)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기 기념 좌담. 〈기독교보〉 2020. 5. 30.
56) 안용준, 앞의 책, 544.
57) 손동연은 여수에 있는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특정교단의 소유물인양 취급되고, 특정교단의 성지라고 팻말을 꽂아 둔 것에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물론 이것은 애양원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교단이기 때문에 이해해 줄 수 있는 부분이지만, 엄격히 따지자면 부친은 그 교단과 상관이 없고, 고려파에 속한다“고 했다. www,agoragen.com/?p=5993(2020년 1월 17일 출력)
58)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기 기념 좌담, 〈기독교보〉. 2020. 5. 30.


참고문헌
손양원,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손양원》, 서울: KIATS, 2009.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기 기념 좌담회, 〈기독교보〉, 2020.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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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타전💥: 추미애 vs 윤석렬 현장포착!!!!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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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파쇼 처단했던 국민들이 내로남불 사이비 문구라 ... YK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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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역의 허상 (서민교수) 재앙의 구라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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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앙 여러분께 작별인사 하려고 합니다 (2) 마파람짱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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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언론인연대 군산 팸투어… “새로운 군산을 조... 임두만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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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신공항, 천인공노할 일”… 국민의힘, 부산 ... 아이엠피터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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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 절대 필요없다.....만인의 악의 축이 될 것...... YK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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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공항 증설로 충분.. 결론 뒤집은 부산 가덕도 신... YK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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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음모론을 믿지 마라 나무맛사탕막...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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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7주기까지 성역없는 진상규명 완수” 뉴스프로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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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보다 무능한 병신 문재인 ㅋㅋㅋ 최순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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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검찰개혁, 공수처 이기명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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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안능동지(安能動之) 이정랑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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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짜리가 1등 윤석열 욕하는 추미애 아이러니.... YK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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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하버드2인방 난타전 총정리 현각vs혜민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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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이 도람뿌라 부르는 이유 트럼프 아냐.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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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존엄 윤석열 장모의 육성공개 (1) 0042625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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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람뿌 vs 💔포르노 배우=점입가경 셀프사면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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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말했던 중앙일보 기자들의 “홍 사장님 힘내세... 아이엠피터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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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정신의 몰이해, 그리고 윤희숙이란 괴물 권종상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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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서 목사가 권총 쏴 친구살해💥 쌀벌하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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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앞 라이브카페'시나위'에서 본 배우 목티에 가디... 마파람짱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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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끼로 버텨요 색즉시공공즉...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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习近平主席的母亲是蟑螂吗? 习近平...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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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붓"은 통일된 한반도를 가정한 노래로 보면 ... (1) 마파람짱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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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석열 총장의 지지율이 급등한 이유는? (1) YK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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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조 높은 서프를 위하여 올리는 글. 높은 격조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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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똑똑한 사람들 모임 안내😍 (2) 모두 모여라!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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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익선+추악한 금권선거✔ 현금 박치기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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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스티유 뒷 골목에 막걸리 집 생겼다 김순신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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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으로 올라간 개 절대 못 내려 온다 (上屋抽梯) 김순신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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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붓: 박우철의 "연모"확실히 연륜이 깊이 있어... 마파람짱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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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개국공신의 치욕적 몰락... 이정랑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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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장교 결초보은😍 (1) 스승과 제자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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