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대한민국의 미래 방향을 소위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그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쌓인 각종 부조리, 즉 적폐를 청소하고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정의가 깃든 세상을 만드는 행위'라고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애초에 '민주주의'라는 것이 이런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수단적 성격이 강했다. 가령 세습왕조에서는 국가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에 왕가에서 태어나서 형제들과 골육상쟁을 벌이고 승리한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손발이 되어서 움직일 수 있는 정치력을 갖춘 소수 벼슬아치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임금을 인군(人君)이라고 하고, 人君을 보좌해서 나라를 이끄는 벼슬아치를 인신(人臣)이라고 한다. 인민(人民)은 인군과 인신의 지시에 따라서 '착하게' 살면 되었다.

인민이 국가공동체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길은 막혀 있었다. 물론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사로잡힌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을 한성부로 압송하려고 했지만 평양 백성들의 압력에 못 이겨서 평양 백성들이 그들을 죽이도록 놔둘 수밖에 없었듯이, 옛날이라도 인민들이 양순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인민이 굉장히 사나웠던 경우는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오히려 인민이 이렇게 사나우니까 이런 비이성적인 군중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서 민중이 국가대사에 참여하는 길이 막혔다고 보는 것이 옳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분노한 군중의 함성이라기보다 애초에 군중이 그렇게 모여서 큰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따금씩 군중이 모여서 큰 목소리를 내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더라도, 그것은 이런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간단계로서 정당화될 뿐이지 다중이 모여서 소속감을 과시하고 뿌듯한 축제 기분을 느끼는 그 자체를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을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이 지연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제17대 대선이다. 2007년 당시 대한민국이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이명박을 막기 위해서 손학규든 정동영이든 누군가를 중심으로 단결해서 대통령으로 선출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당시 소위 '민주진보개혁세력'은 선거에 대거 불참했고 그 이듬해인 2008년에 대규모 시위를 벌여서 소위 '국민주권'을 과시했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선거에 대거 불참해서 역대급으로 낮은 투표율을 기록해놓고 그 이듬해에 대규모 시위를 벌인 '민주진보개혁세력'은 민주주의가 뭔지 기본조차 몰랐다고 본다. 이런 점도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기본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까 객관적으로 봐서는 좋은 기회가 다가왔는데도 그것이 기회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치고 또 놓치는 한심한 행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지.

하여튼 국가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면 그 소수가 마피아를 구성해서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크게 해쳐서라도 소수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이 부분부터 바로잡아야 국가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사회정의를 이룩하기 위한 중간수단으로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런 주장이 힘을 얻어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가 되었다.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1987년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실현되면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제도적으로 보완될 필요야 끊임없이 제기되겠지만 말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민주적 선거제도를 통해서 집권세력이 교체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총칼이 아닌 선거를 통해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 정당에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배출하면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집권했다고 대한민국이 패러다이스가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배고픔'을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표현하기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사회정의'라고 표현한다든가, 굳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넣고 싶다면 '민주주의의 미시화' 내지 '민주주의의 일상화'라고 해야겠지. 근데 사실 어떤 나라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서 소수 인종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그걸 '민주주의 부재'라고 표현할 수가 있나? 그 나라의 주류 인종 대다수가 광기에 사로잡혀서 소수 인종을 마구 학살했다면 인류의 휴머니즘 관점에서야 명백한 죄악이지만 '민주주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다중의 광기와 결합하면 민주주의야말로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정의'라는 도식적 생각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다시 말하겠다. 소위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자가 달리 표현하자면 '사회정의'라는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여정부 시기에 유시민 작가가 TV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국가 목표로 장기목표, 중기목표, 단기목표, 초단기목표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장기목표는 소위 '실질적 민주주의'이고 필자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정의'다. 이런 장기목표를 달성하려면 어떤 중기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필자가 단언한다. 독일제국 수립에 기여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성공시켰고, 20세기 초에 러시아 정치를 담당했던 표트르 스톨리핀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지만 중도에 좌절한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을 중기목표로 설정해야 '실질적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

제11편에서 계속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