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편에서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장기목표가 '사회정의' 추구라는 점을 밝혔고, 이런 '사회정의'가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던 '실질적 민주주의'와 내용면에서 동일하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이런 장기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이라는 중기목표를 먼저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글을 마쳤다.

수동혁명에 관해서 논해야겠으나, 그러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워낙 구심점이 없어서 궁색하게 소위 '민주진보개혁세력'이라고 자처하던 유권자들이 두루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인 관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잘못한 점을 지적한다면 어떤 점을 지적해야 할까?

2006년쯤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난여론이 워낙 심해서 폭우만 내려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라며 노무현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노무현 대통령이 자꾸 이러면 정권재창출 못한다."고 지적을 했다. 그 때 기자회견이었는지 어떤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반문했다. "저한테 정권을 재창출할 책임이 있습니까?"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 이 발언에 담겨 있는 노무현의 인식이 노무현의 최대 과오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2월 25일 취임해서 탄핵소추로 대통령 신분만 유지한 채로 권한행사가 정지된 두 달가량을 제외하고 2008년 2월 25일에 퇴임할 때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추진했건 노무현은 취임 직후부터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운명이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것 말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도 있지만, 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정질서에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늦어도 5년 뒤에는 반드시 퇴임한다는 사실뿐이다. 중간에 탄핵소추되어 권한이 정지되거나 탄핵심판청구 인용 또는 급사 등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할 가능성은 있지만 취임 후 5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람이 여전히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명백한 위헌사태다.

노무현은 아무리 늦어도 2008년 2월 25일에는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노무현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대한민국의 시간이 그 시점에서 멈추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다른 누군가가 대통령이 되어서 대한민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다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잘못 이끈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애써서 이룩한 성과가 말짱 도루묵이 될 것 아닌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2021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노무현이 이룩한 치적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노무현에 대한 추억'이지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이룩한 성과'가 아니다. 이 점을 착각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당시부터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을까?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2003년 2월 25일에 대통령에 취임하는 그 순간부터 필자가 지금 지적하는 이런 점을,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그 결과로 성과를 냈더라도 한나라당 후보가 자신의 뒤를 이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면 그 성과는 거의 모조리 무효화되리라는 점을 인식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어떻게 달랐을까?

일단 필자의 생각을 말하겠다. 어쩌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2003년 2월 25일에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그 순간부터 이런 생각을 했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노무현의 생애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노무현이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정치를 했더라도 2009년 5월 23일 일요일의 비극 자체는 피할 수 없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후, 노무현의 비극적 최후 이후에 펼쳐진 2010년대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에는 큰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필자는 감히 주장한다.

안타까운 점은, 2021년 이 시점에도 소위 '민주진보개혁세력' 내부에서도 이런 부분을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부분이다. 헤겔이 말했나? "역사는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 다음에는 희극(즉 코미디)으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비극'의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코미디가 된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씀하셨지 않나? "눈 덮인 벌판을 걸으면서 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너의 발걸음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노무현 한 사람이 대통령 되어서 개인플레이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민주당과 그 지지자 전체가 팀을 이루어서 지속적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며 차츰차츰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했던 2003년경에는 대한민국에 이런 인식 자체가 매우 희박했다. 노무현 개인을 비난하자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모범적인 정치인은 이해찬 전 국무총리다. 이해찬 전 총리는 한나라당 소속 이명박-박근혜가 장기간 정권을 잡으면 민주세력 내에서 변절자가 늘어나는 사태가 벌어질까봐 항상 염려하더라. 자신이 절개를 잃을지 잃지 않을지 그 점에만 관심을 집중할 뿐 민주세력 내에서 변절자가 늘어나는 사태를 걱정하지는 않는 유시민 작가와는 그릇 크기부터가 다르다는 점을 늘 느낀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당수가 '더불어민주당 20년 집권론'을 주장한 것도 이런 통찰력에서 우러나온 발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세간의 여론은 이런 심오한 생각을 오만과 독선 정도로 여기는 것 같더라. 비극이다.

그런데 이해찬 전 당수의 언행 중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바로 필자가 전편에서 언급한 '수동혁명론'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주당이 장기집권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필자는 공감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동혁명론까지 주장했어야 한다. 이해찬 전 당수가 민주당 장기집권론을 주장하면서 수동혁명론까지 곁들여서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 바로 그 점이 이해찬이라는 정치인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제12편에서 계속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