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WWW.SURPRISE.OR.KR / 박한표 / 2024-12-3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30일)
로마 교황청의 2025년 희년 선포 칙서가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이다. 라틴어로는 Spes Non Confundit이다. 사람은 빵보다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희망을 갖자. ’Dum vita est, spes est(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라는 라틴어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이 말은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건배사로 내가 자주 쓰는 것이 “스페로(spero), 스페라(spera)”이다. 이 말은 “나는 희망한다. 그러니 너도 희망하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나는 숨쉬는 동안 희망한다’는 라틴어 ‘Dum spiro, spero(둠 스피로, 스페라)’에서 나온 말이다. 불행과 고난을 버티게 하는 힘은 실낱 같은 희망이다. 지금은 돈이 없어도, 집이 없어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해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지금보다 나아지리 란 희망이 있을 때 사람은 초인적인 성실성과 인내심을 발휘한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알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절망의 순간을 살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책은 철학이나 문학 또는 역사 등 인문 사회 과학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예술 분야의 기술 과학 의학 등까지도 아우른다.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를 희망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꿰뚫는 사상서이다. 그는 희망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의하였다.
▪ 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 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극복하게 된다.
▪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희망은 인간 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해 준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사람이다.
희망과 함께 2025년에는 윤 탄핵을 넘어,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사회 대개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도 부족해, 시민이 피 흘려 만들고 지켜온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윤과 그 수하들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작금의 사회 경제적 위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왕(王) 자 새긴 또 다른 윤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도널드 트럼프가 왜 미국인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는 지를 숙고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응원봉’을 든 우리 시민들은 이제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 다시는 윤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수고를 보고 싶지 않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자살률, 가장 낮은 출산율, 소득과 자산 불평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위기는 이미 1990년대부터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윤이 등장했고, 그는 그 모순 속에서, 그 내란 수괴가 되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그의 탄핵이다. 그와 그의 추종세력을 차단하여야 한다. 무장한 계엄 군이 국회를 침탈한 행위 하나 만으로도 윤이 내란을 주도한 수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를 옹호하는 집단이 아니라면 윤을 탄핵 하는 것에 반대할 순 없다. 윤 탄핵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 중 하나 여야만 하는 이유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한 번의 경험이 있다. 지난 2016~2017년 ‘박 탄핵’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탄핵이 한국 사회의 대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탄핵이 일부의 소망처럼 사회 대개혁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깃발과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12·3 내란사태와 같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명백한 악행에 맞서 두려움 없이 ‘거대한 저항’의 쓰나미를 만든다. 하지만 그 시민과 시민들은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위험에는 외면하고, 더 나아가지 않는다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1990년대부터 그나마 괜찮아 보였던 성장도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2021)가 추정한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00년대 초 3.8%에서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1.9%로 낮아졌다. 203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회원국 중 가장 낮은 0.8%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다음과 같은 문제들 때문이다.
▪ 저 출생과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를 상쇄할 혁신 역량이 취약하다.
▪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불공정한 학벌 경쟁을 통해 대를 이어 세습되는 사회가 공고화 되어가고 있다.
▪ 대기업 집단에 편향된 경제가 좋은 일자리를 줄이고 비정규직과 같은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고 있다.
▪ 감세 정책이 국가 역량의 근간을 훼손하고 약자 복지라는 기괴한 정책으로 공적 복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정치는 사회경제적 전환을 지체 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눈을 돌리고 있다. 시민들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만든 시장 중심의 경쟁 질서에서 치열하게 ’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가 스스로 제 살길을 찾는다)’을 모색하고 있다. 사회는 없고 개인만 있다는 신념을 내면화 한 것처럼 말이다. 이번 12·3 내란사태를 겪으면서 국내외 언론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 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헌신을 칭찬하고 있다. 하지만 명백한 위협엔 저항하지만, 민주주의의 토대를 갉아먹는 사회 경제적 위험엔 눈을 돌리고 그 위험을 만든 구조를 내면화 해 ’각자도생’하는 시민들이 제대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평등을 보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은 불평등과 같은 사회 경제적 위험이다. 그래서 사회경제적 위험에 침묵하는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인하대 사회복지학과·복지국가재구조화센터장인 윤홍식 교수의 주장이다. “가는 해 오는 길목에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가는 해 오는 해 길목에서 / 경한규
또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아쉬움과 작은 안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립니다
봄볕 같은 햇살에
땅 끝이 다시 파릇파릇 되살아나
겨울이 겨울답지 않다고 투덜거리다가도
가던 길 멈추고 별빛 끌어내리면
이내
없는 이들의 가슴에 스미어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12월의 플랫폼에 들어서면 유난히
숫자 관념에 예민해집니다
이별의 연인처럼 22 23 24......31
자꾸만 달력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한 해 한 해
냉큼 나이만 꿀꺽 삼키는 것이
못내 죄스러운 탓이겠지요
하루하루
감사의 마음과 한 줌의 겸손만 챙겼더라도
이보다는 훨씬
어깨가 가벼웠을 텐데 말입니다
오는 해에는
이웃에게 건강과 함박웃음 한 바가지만
선물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떠있는 섬과 같습니다
못난 섬
멀리 내치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2024년 겨울 광장, 리베카 솔닛이 말한 ‘재난 유토피아’가 피어났다. 우리는 계엄이라는 정치적 재난에 맞서 생겨난 광장의 체험에 환호하고 감동하고 있다. 우리가 광장의 체험을 갈망해왔고 이 갈망을 구현할 능력이 있음도 깨달았다. 광장의 체험은 밝은 눈과 맑은 마음으로 함께 현실을 읽고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좋은 것들을 깨우라는,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초대다. 재난(disaster)은 어원상 ‘별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사라진다’는 뜻의 ‘dis’와 ‘별’을 뜻하는 ‘aster’로 이루어져 있다. 별이 사라지는 것이 재앙이다. 나침반이 나오기전에 항해를 할 때는 항상 별을 보고 방향을 잡았는데, 구름이 끼거나 폭풍우가 치면 별이 사라져 방향을 잃게 되므로, 그것을 재앙이라고 한 것이다. 응원봉은 서로에게 보이는 별이 되었고 선결제는 보이지 않는 별을 서로의 마음에 새겼다. 광장에서 불법 계엄, 친위 쿠데타, 내란이라는 재난을 이겨낸 우리는 불현듯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새해, 광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소망한다. 사람들은 가장 아끼는 것을 선뜻 광장에 가져왔다. 청년의 응원봉이, 농민의 트랙터가 그랬다. 무엇보다 ‘시간이 돈’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일 저녁과 주말 시간을 기꺼이 내놓은 사람들은 소비자가 아니라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행동했다. 그러자 일상에 만연하던 무관심과 무기력, 방관과 순응이 사라지고 이타심과 관용, 사회적 소속감과 공적 사안에 대한 열망, 치유와 해방 등 평소 접하기 어렵던 것이 일상이 되었다. 광장은 경청과 격려, 환대와 협동, 포용과 돌봄의 장이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노동자, 농민, 이주민 등 위태로운 삶을 이어온 사회적 소수자가 광장에서 만나 서로를 공감하고 위로했다. 이들은 탄핵을 넘어 경제 불평등과 노동, 차별과 혐오, 장애인 이동권, 기후와 생태 등 권력이 무시해온 사회개혁 의제를 광장 한가운데로 가져왔다. 광장은 남태령의 전봉준투쟁단, 안국역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해고노동자 농성장 연대로, 전태일의료센터건립위원회 후원으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 광장은 민(民)이 주도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장이었다.
다른 세계로 가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것은 사람과 생명보다 성장과 이윤을 맹신하는 경쟁과 효율 체제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강자의 기득권 수호에 복무하는 신자유주의 장벽이 우리 일상에서 광장의 역동성을 원천 봉쇄한다. 여기는 거대 양당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 넘기가 가장 까다로운 곳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면 광장이 닫힌 후 무관심과 환멸이 밀려오고 그 피해는 모두의 몫이다. 2016년 광장은 박근혜 퇴진에서 멈추었고 5년 후 우리는 괴물에게 권력을 쥐여주었던 경험이 있다.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광장에서 희망을 본다. 재난에 맞서서 청년들이 만들어낸 광장의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역동성이 무엇보다 강력한 희망의 원천이다. 남은 과제는 광장과 일상을 연결하는 일이다. 광장의 역동성을 제도적으로 구현하여 일상에서 계속 작동하게 해야 한다. 동시에 역동성이 제도로 경직되지 않게 광장의 담론을 다양한 공론장으로 가져와 사회적 공감과 연대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
‘2024 광장’은 ‘퇴진 광장’을 넘어서, 광장의 역동성으로 분열과 고립의 일상을 깨는, 체제를 바꾸는 ‘전환 광장’이어야 한다. 광장에 울려 퍼진 ‘다시 만난 세계(Into the New World)’는 이전과 판이한 ‘새로운 세계’ 이어야 한다. 새해,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발걸음이 멈추지 않길 소망한다. 서강대 명예교수이신 조현철 신부의 주장이지만,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 제주항공 사고로 희생된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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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