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국가 미국의 평화 1
독자를 위한 전쟁 입문, 전쟁 없이 평화 없다.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1-09)
아베 고타이阿部幸大
1987년생. 쓰쿠바 대학 인문 사회계 조교수. 전공은 미․일 문화사.
『완전히 새로운 academic writing 교과서』『narrative의 피해학被害學』 등의 저서가 있다.
■ 평화주의자 오바마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AP=연합뉴스, 자료사진)
2009년 10월 9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버락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시기는 같은 해 1월이며, 그리고 불과 몇 달 뒤,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었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오바마는 뭐를 이룩했다는 걸까.
사실은, 노벨 평화상 수여에 값할 만한 실적이 구체적으로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종종 언급되는 것은, 핵무기 폐지에 대한 의지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연설은, 취임 3개월 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행해졌다(‘인용 1’ 참조). 핵을 전쟁 무기로 사용한 역사를 가진 유일한 국가인 미국은, 그 폐지를 위해 ‘행동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분명히 말해 그는 갈채를 받았다.
【인용 1】
Barack Obama, Remarks in Prague , April 05, 2009
Just as we stood for freedom in the 20th century, we must stand together for the right of people everywhere to live free from fear in the 21st century. (Applause.) And as nuclear power ― as a nuclear power, as the only nuclear power to have used a nuclear weapon, the United States has a moral responsibility to act. We cannot succeed in this endeavor alone, but we can lead it, we can start it.
So today, I state clearly and with conviction America´s commitment to seek the peace and security of a world without nuclear weapons. (Applause.) I´m not naive. This goal will not be reached quickly ― perhaps not in my lifetime. It will take patience and persistence. But now we, too, must ignore the voices who tell us that the world cannot change. We have to insist, “Yes, we can.”
그러나 오바마가 이처럼 단기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의 정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미래에 대한 기대였다. 케냐인 아버지를 둔, 하와이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내고, ‘테러와의 전쟁’ 시대에 ‘후세인’이라는 가운데 이름(Barack Hussein Obama II)을 가지고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된 이 흑인 남성에,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미국, 그리고 세계는, 어쩌면 인류의 미래 ‘평화’를 맡겨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느꼈던 게 아닐까.
테러리스트 쪽에 붙을래, 아니면 미국 편에 설래, 라는 조잡한 이분법을 세계에 들이댄 전임자 조지 부시의 우매한 이미지와 강렬한 대조를 이루어, 오바마는 지성과 정열과 이데올로기로 뒷받침된, 다문화주의 정신 그 자체였다.
그런 기대를 오바마는, 수상 강연에서 입증하게 된다(‘인용 2’ 참조).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역사를 정의 쪽으로 돌릴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그는 연설을 시작했다. 그 행동이란 뭘까? 전쟁이다.
【인용 2】
Barack Obama, A Just and Lasting Peace, December 10, 2009
I make this statement mindful of what Martin Luther King Jr. said in this same ceremony years ago: “Violence never brings permanent peace. It solves no social problem: it merely creates new and more complicated ones.” As someone who stands here as a direct consequence of Dr. King’s life work, I am living testimony to the moral force of non-violence. I know there’s nothing weak – nothing passive – nothing naïve – in the creed and lives of Gandhi and King.
But as a head of state sworn to protect and defend my nation, I cannot be guided by their examples alone. I face the world as it is, and cannot stand idle in the face of threats to the American people. For make no mistake: Evil does exist in the world. A non-violent movement could not have halted Hitler’s armies. Negotiations cannot convince al Qaeda’s leaders to lay down their arms. To say that force may sometimes be necessary is not a call to cynicism – it is a recognition of history; the imperfections of man and the limits of reason.
사실, 이 “A Just and Lasting Peace” 바로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그는 대부분의 말을,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이야기하는 데 허비했다. 연설 당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의 대통령이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이상한 일이며, 정말로 “오늘은 전쟁이라는 문제의 결정적 해결책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뭐 그건 좋다고 치자.
그러나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리는 ‘정의의 전쟁just war’에 대한, 다시 말해 올바른 전쟁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어느 시대도 순수한 악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고, 히틀러도 알카에다도 폭력 없이 타도할 수 없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전쟁을 끝내야 할까보다도, 어떻게 싸울까이며,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이면 무력행사가 “필요하고 또 윤리적으로 정당화될까?”이다.
그런데 그 어떤 상황은 도대체 뭘까? 그 어떤 상황을 결정하는 자는 바로 미국이어야 한다 ― “그것이 미국과 적을 가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힘의 원천입니다.” 이렇게 임기 1년째를 시작한 오바마는, 8년 뒤, 평균 하루 71개의 폭탄을 세계에 퍼부어댄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치게 된다.
■ 전쟁과 평화의 100년
노벨 평화상이 미국 대통령에 수여된 경우는, 오바마가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1906년), 두 번째는 우드로 윌슨(1919년). 오바마의 거의 100년 전에, 제26대와 제28대 대통령이 잇따라 수상했다. 수상 이유로는, 각각 러․일 전쟁의 화친, 그리고 국제연맹 창설, 이것들에 대한 공헌이 꼽혔다.
“부드럽게 말하고 큰 곤봉을 들어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라는 ‘곤봉 외교’로 유명한 루스벨트에게, 원래 평화주의자라는 이미지는 엷었으리라. 그러나 ‘14개 평화 원칙’으로 유명하고, 프린스턴 대학 총장도 지낸 지성인이기도 한 윌슨은, 실제로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한 대통령이며, 그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오바마의 그 점과 매우 비슷하다.
윌슨의 임기는 1913년에 시작되는데, 그가 1916년에 재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14년부터 시작된 유럽에서 벌어진 대전쟁에 미국이 말려들지 않게 한 회피 ― 다시 말해 평화주의 ― 가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권 2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그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선언을 맞이해 의회에 참전을 제안하게 된다(‘인용 3’ 참조). 독일의 행위는 “모든 국가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전쟁”이어서, 미국은 “세계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오고, 세계를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만 한다. 이 논리는, 국제연맹의 전신이 되는 단체의 명칭이 The League to Enforce Peace, 바로 평화 강제 연맹이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놀랍지 않으리라.
【인용 3】
Joint Address to Congress Leading to a Declaration of War Against
Germany
We are accepting this challenge of hostile purpose because we know that in such a Government, following such methods, we can never have a friend; and that in the presence of its organized power, always lying in wait to accomplish we know not what purpose, there can be no assured security for the democratic Governments of the world. We are now about to accept gauge of battle with this natural foe to liberty and shall, if necessary, spend the whole force of the nation to check and nullify its pretensions and its power. We are glad, now that we see the facts with no veil of false pretense about them to fight thus for the ultimate peace of the world and for the liberation of its peoples, the German peoples included: for the rights of nations great and small and the privilege of men everywhere to choose their way of life and of obedience. The world must be made safe for democracy. Its peace must be planted upon the tested foundations of political liberty. We have no selfish ends to serve.
미국은 세계 평화를 위해, 본의가 아니지만 정의의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 이것이 미국 대통령들이 놀라운 역사적 일관성을 가지고 주장해 온 이야기다. 그 역사적인 계보는, 이미 언급한 루스벨트는 물론, “쿠바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려 하는 사심 없는 공정한 소망”을 내걸면서 미국 최초의 해외 식민지 획득에 이르렀던 제25대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미국․스페인 전쟁에도, 오마바가 인용한 저 “a just and lasting peace”의 확립을 구가하며, 승리의 새벽에는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약속한 제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남북 전쟁에도, “멕시코와 화평을 확립하고자 하는 강한 소망”에서 광대한 지역을 할양하게 한 제11대 제임스 녹스 포크 대통령의 미국․멕시코 전쟁에도, 선주민의 강제 이주가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모든 충돌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에 그것은 선주민에게도 도움이 된다며 더없이 잔학했던 제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에게도, “평화 유지라는 절실한 의향”을 표명하면서 지중해에 파병해 미국 군사 역사상 최초가 되는 해외 전쟁을 감행한 제3대 토머스 제퍼슨에게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 대비하는 일”이라는 초대 대통령에 어울리는 일정한 공식처럼 규정한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게도, 소급될 수 있다.
이 연재에서는 그런 긴 역사 속에, 제1차 세계대전부터 ‘테러와의 전쟁’까지, 윌슨에서 오바마까지 약 100년의 전모를, 대략 10회에 걸쳐 간략하게 묘사하고자 한다. 전쟁 국가 미국의 평화. 그 역사를 알 때, 당신은, 아베 신조가, 이스라엘이, 파키스탄이, 그리고 캄보디아가, 도널드 트럼프를 노벨 평화상에 추천했다는 뉴스를, 더 이상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이다.
■ 문화를 공부하는 의미
이 연재의 특징과 방침에 대해, 몇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먼저 이 연재는, 이미 지면을 보고 알 수 있듯이, 대통령의 연설을 본문과는 별도의 칼럼으로 게재하고, 좀 긴 영어 원문을 인용한다.
따라서 첫째, 대통령의 생생한 영어를 조금 맛보는 동시에, 둘째, 영어 학습자에게는 학교 수업 같은 데서 배우기 어려운 어학과 번역의 포인트를 얻게 해주고, 그리고 셋째, 역사 학습자에게는, 이런 1차 자료의 텍스트에서 어떻게 자기 나름의 착안점으로 ‘이론’을 세울까, 그 프로세스를 접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음으로, 묘한 타이밍에 자기소개를 시작해서 죄송하지만, 나는 ‘문화사’ 전문가를 자칭하는 연구자다. 다시 말해 문화에 대한 역사가, 영어로 하면 cultural historian으로, 감이 안 올 수도 있지만, 아마 당신도 세계사 교과서에서 각 장의 끝에 화가나 소설가 등의 기술이 미안할 정도로 덩그러니 배치되어 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거다. 그처럼, 문화의 역사라는 존재는 역사의 주류를 이루는 정치사 기사에 잘 편입되어 있지 않고, 문화를 ‘역사’의 일부로 유기적으로 이해할 기회는, 현재의 학습 환경에서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와 산업과 사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문화도 역사의 일부이며, 문화는 역사 속에서 태어남과 동시에, 문화가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점이 이해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그리고 세계가 문화에 의해 구동되는지를 못 보고 놓치게 된다. 예를 들면 독재자가 문화를 맨 먼저 탄압하는 일의 의미도, 오바마를 평화주의자로 착각하고 마는 일의 의미도, 당신이 전쟁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일의 문제도, 온전하게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 연재에서는 문화를 역사의 일부로 배우는 일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역사를 문화의 일부로 배우는 일이란 무슨 의미인가를 알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
이 연재는 말하자면, 당신이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 ‘문화’라고 생각하는 것,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 모두를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논하려는 시도이다. 거기에서 이른바 ‘인문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뭐를 하는 학문인지에 대한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쇄신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문화와 전쟁’이라는 주제로 미국의 역사를 논하는 데 즈음해, 다음 연재부터는 원칙으로, 연설, 사진, 영화라는 세 가지를 각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우리는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시대를 상징하는 ― 그야말로 세계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듯한 ― 사진과 포스터 등의 이미지를 바라보고, 그리고 전쟁과 할리우드 나라인 미국의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를 이루는 전쟁 영화를 봄으로써, 거기에서 ‘이야기’를 이해하고, 역사를, 전쟁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아는 ‘역사’는, 예를 들면 “오바마는 평화주의자였다”라는 이미지처럼, 편향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편향’을 교정하는 일이 아니다. 될 수 있으면 편향을 교정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진실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러한 편향된 이야기를 통해서만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
예를 들면, 전쟁 영화는 허구이기에 편향되어 있고, 역사 교과서의 기술은 중립적이라는 생각은 오류라고 이 연재는 여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역사’는 편향되어 있으며, 편향되지 않은 역사 기술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도 사진이든 소설이든 연설이든 교과서든, 그것들은 모두 각각의 처지에서 각각의 견해에 기반하여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편향은, 그것들의 ‘이야기’를 가치가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 편향된 ‘이야기’가 역사라는 사실을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임을 먼저 알고 나서, 그 이야기들을 음미하는 게 중요하다.
보도도 연설도 영화도, 그것들이 이 세계에서 우리의 역사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에서는 한층 분석할 만한 것이며, 이러한 견해나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문화사라는 학문이다.
■ 평화를 위한 전쟁?
최근 어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0년부터 2005년에 걸쳐서, 우리는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군대를 동원해 왔다. 2015년, 역시 우리나라에 대한 침공을 막기 위해, 우리는 무력을 행사해야 했다. 그리고 현재, 또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 “조국과 국민을 방위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무력에 호소하도록, 놈들이 우리를 몰아간 겁니다.”
이렇게 말한 대통령은, 부시도 오바마도 트럼프도 바이든도 아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다.
전쟁을 도발할 때,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런데도 공격합니다”라고 선언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도, 러시아도, 이스라엘도, 그리고 일본도, 섬뜩할 만큼 비슷하고 평범한 레토릭과 논리로 자국의 무력행사가 얼마나 정당한가를 열변으로 과장해 왔다. 그 무력행사는 언제든 평화를 위한, 자유를 위한, 정의를 위한 것이며, 세계를 위한 것이다.
다만, 그 비슷한 이야기를 리버럴한 이미지를 걸친 미국 대통령이 이야기할 때와 독재자 이미지를 걸친 러시아 대통령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전쟁 행위의 선악에 대해, 전혀 다른 인상을 받고,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기만의 이야기가 모든 전쟁에 따라다니는 것, 그리고 그런 레토릭을 자신의 힘으로 간파하기 위한 비판적 독해력을 익히는 일이, 이 연재의 목표다.
교묘하게 표현된 이야기에, 우리는 아주 간단히 설득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을 간파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 그것이 폭력을 긍정하기 위한 표현인지 아닌지, 그것만 보면 된다.
(『세카이』, 202601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