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작가
B. R. 마이어스
출판
시그마북스
발매
20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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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있는 북한, 극단적 민족주의를 직시하게 하는 책.

물론 이 책의 목적은 '북한 바로 알기'이다.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이 아니라 인종에 기초한 극단적인 민족주의라는 것을 문학을 비롯한 여러 대내 선전 자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의 영문 원제는 The Cleanest Race이다.) 북한이 이러한 극단적, 극우적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는 한 한반도 평화 통일은 물론 남북간, 북미간 관계 개선 및 북한의 핵 포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비관론을 바닥에 깔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의 정치적 입장이 미국의 잣대로 볼 때 진보(민주당)보다는 보수(공화당)에 더 가까와 보이기는 하지만, 남북 관계에 대한 비관적 시각은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비슷했다. 이 책의 가장 큰 의미는 오히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북한식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직시하고 재발견하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뿌리가 일본의 극우적 군국주의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결국 북한식 민족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결론까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이 아니라 민족주의라는 견해는 사실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내게는 새롭게 다가왔다. 북한 정권을 세운 김일성부터가 마르크시즘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생각해 보면 중국의 마오쩌둥, 덩샤오핑, 베트남의 호찌민은 물론, 박헌영, 김단야 등 조선공산당의 여러 지도자와 비교해 볼 때 김일성은 결코 '사상가'나 지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 다수의 동아시아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이었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반지성주의적이라고까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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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약점을 메꾸기 위해 김일성은 황장엽을 시켜서 '주체사상'이라는 외부용 이데올로기를 만들게 하는데, 저자는 이 주체사상의 따분하고 지루한 표현이 의도된 것이라는 파격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 주체사상을 명쾌하고 매혹적으로 만들었다면 북한의 일반 대중이 지배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를 버리고 이 새로운 사상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주체사상이라는 게 여기저기서 좋은 말만 모아 놓은 금언집 같다는 생각이야 옛날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게 의도적이었다니... 그리고, 이 주체사상에 혹해서 주요 '정파'를 만들기까지 한 NL 운동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기는, NL들도 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체사상을 '대외용 간판'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내심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북한의 극단적 민족주의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으니 말이다.)

저자는 북한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조선인들은 혈통이 지극히 순수하고, 따라서 매우 고결하기 때문에 어버이 같은 위대한 영도자 없이는 이 사악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어린이처럼 순수한 민족과 어머니같이 인자한 지도자의 결합인 셈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 민족'으로 상징되는 순수를 중시하는 민족주의, 외국인에게 지극히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우리 남한 사람에게도 익숙하다. 다만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순수한 어린이,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약간 거북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우리의 60-7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 삽화와 같은 '오글오글한' 그림이 지금도 각종 선전 자료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이러한 '순수' '순결' 이미지는 요즘 전국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위안부 소녀상과도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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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 중 가장 특이했던 부분이 바로 북한의 개인숭배가 '어머니로서의 지도자'를 강조한다는 주장이었다. '어머니같은 지도자'는 '순수한 어린이와 같은 조선 민족'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김일성은 가부장적인 '아버지 수령'이 아닌 자웅동체적인 '어버이 수령'이었으며, 선전 그림에 나타난 모습도 여성적인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일은 한층 더 모성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이러한 여성적, 모성적 리더십의 강조가 바로 북한 정권이 안정을 유지하는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가부장적 권력자보다 모성적 권력자에게 저항하는 것이 훨씬 힘들 테니 말이다. 북한의 장군들이 병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때문에 사기가 높다는 얘기 역시 이 '어머니 리더십'과 같은 맥락인 듯하다. 물론 북한에 '남성적'인 권력 투쟁이 없다는 얘기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 리더십'이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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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자는 북한을 유교 전통이 지배하는 국가로 보는 시각을 배격한다. '어린이같이 순수한 민족'이 굳이 유교에서 강조하듯 자기 수양을 할 필요가 없으며, '어머니같은 지도자'는 유교적인 가부장적 권력자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당에서 유교적인 제사 관습을 인정하거나 장려하지 않는 점도 지적한다. 북한이 공론정치, 붕당정치 등으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의 유교적, 사대부적 정치문화 전통을 전혀 계승하지 않았다는 것도 덧붙여야 할 듯하다. 북한이 '유교 국가'인 증거로 흔히 제시되는 여성 차별은 그냥 전근대 사회의 특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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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거북한 대목은 북한의 이러한 극단적 민족주의가 바로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식민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조선인의 민족주의를 부추겼으며, 단군신화나 백두산과 같은 민족적 상징들도 일본의 만세일계 천황, 후지산 숭배 등을 '참조'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대목은 이영훈 등 우리나라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한 것 같기도 하다.) 김일성-김정일의 '어머니 리더십'도 천황의 '인자함'을 강조하는 일본의 천황 숭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근대 민족주의 형성에 일본이 큰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과연 일본이 조선의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고취시켰는지의 여부는 좀 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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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극단적 민족주의로 바라본 북한의 미국 및 한국(남한)에 대한 시각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물론 그렇다고 대북 관계 개선 노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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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북한이 가지는 반미 감정의 기원이 한국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 조선에 왔던 미국 선교사들의 '만행(세균 주사에 의한 어린이 살해)'으로 선전되고 있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브루스 커밍스 같은 수정주의자들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북한 폭격을 반미 감정의 중요한 계기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론인 셈이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만행'에 있어서도 북한 당국은 미 공군의 폭격보다는 (미군이 아니라 남한 우익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신천 대학살'에 주로 촛점을 맞추고 있다. 1953년의 정전 협정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굴욕적인 항복이며, 1990년대 핵 협상과 그 결과인 경수로 건설, 2000년대 들어 벌어진 6자 회담이 모두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이고, 2006년 핵 실험을 계기로 북한이 이제 미국과 같은 '초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적인 해석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대북 관계 개선 노력이 북한 내부적으로는 '굴욕적 항복'으로 선전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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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나 지적할 수 있는 아이러니는 미국이 항상 최근의 항복 조건을 어기고 북한에 대한 도발을 재개하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극단적 민족주의를 유지시킬 수 있는 외부 자극으로 '미제의 위협'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이 반미 감정의 기원을 식민지 시대로 삼고 있다는 점은 저자가 주장하는 북한 민족주의의 일본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국 선교사의 아동 살해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미 악선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북한의 반미 선전에 나오는 거친 표현들의 원조가 바로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썼던 구호인 '귀축미영'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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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남한의 경제적 풍요도 별 어려움 없이 인정되고, 나아가 이러한 경제적 풍요가 바로 북한 때문이라는 과대망상적인 시나리오까지도 만들 수 있다. 북한이 소위 선군정책과 그 결과물인 핵무기 개발을 통해 미국의 북한 공격을 막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 결과 남한이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남측 민중은 자신의 물질적인 풍요가 김정일의 정책과 조선인민들의 희생 덕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순수'를 중시하는 북한의 민족주의 시각에서 보면 남쪽은 민족적 도덕적으로 '썩은' 곳이고, 남쪽 사람들은 이를 부끄러워하여 하루빨리 통일된 조선에서 '어머니 지도자'의 품에 안기고 싶어하는데, 이를 '미제'가 막은 것으로 해석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북한을 자본주의 세계로 억지로 끌어내려는 의도를 가진 '불순한' 정책으로 묘사된다. 남한의 '괴뢰 정권'이 미국의 허락 없이 북한과 화해 협력을 추진한다고는 절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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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한국과 미국이 바라는 대북 관계 개선이 엄청나게 어려운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북한 정권이 영웅적인 민족주의적 사명을 단순한 경제 성장과 맞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통일을 막아온 주된 세력이 미제가 아니라 바로 같은 동포(남한)이라는 사실을 북한 주민들이 깨닫게 되면 김정일 정권이 표방하는 세계관이 살아남을 수 없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지금 북한과 미국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보다도 북한에 더 위험한 것이다." 이는 북한 핵 포기의 반대 급부로 미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면 대북 관계 개선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대한 통렬한 반론으로,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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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맨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책은 남북관계 개선이 어려운 이유를 문화적인 시각에서 상당히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물론 '내부용 선전 자료를 다 믿느냐'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반이성적인 이데올로기가 북한 사회를 지난 60년 동안 상당히 효율적으로 통제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는 "스스로도 동의하지 않는 세계관을 선전하기 위해 장장 60년 동안이나 그토록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는 정권은 세상에 없다"고 일갈한다. '남북관계 개선으로 한국 국내의 정치/경제/사회 문제를 해소한다'는 주장이 비현실적인 이유가 여기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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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부, 특히 NL 운동권의 '통일 운동'이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인 극단적 민족주의를 지원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남한의 통일운동가가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미제의 자본주의에 더럽혀진 남한 사람들이 순수한 민족성을 보존하고 있는 북한과의 통일을 바라고 있다'는 북한의 주장이 계속 입증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남북 교류를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고, NL 운동권의 방북을 국가보안법으로 계속 단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현재 남한에서 가장 목소리가 센 '통일 운동' 세력이 북한 체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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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반일/반미 민족주의​가 상당히 뿌리깊으며 자유로운 정보와 문화의 교류를 통해서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북한의 현실을 표현한 이 책의 아래 부분에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서구 세계는 북한에 외래의 문화가 침입되는 것에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종에 기초한 민족주의는 문화적인 전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1998년 한국에서 일본의 문화 수입에 대한 금지 조치가 풀린 후부터 반일감정이 줄어들기는커녕 사실상 증폭되었다."

'우리 안의 북한'이라고 표현한 게 바로 이 반일/반미 민족주의이다. (다만 우리의 경우 반미보다는 반일 쪽에 방점을 더 둔 것 같기는 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모든 민족주의는 다 나쁜 것 아닌가 하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혼동을 일으킨다. 인종에 기초한 민족주의는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극단적 국가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크고, 흔히 언급되는 서구 근대의 '민족국가(nation state)'는 차라리 '국민국가'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등장한 '다문화주의'는 '다민족' 내지 '다인종'의 순화된 표현인 것 같기도 하다. 가라타니 고진이 굳이 '네이션'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노출시킨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현 상태에서 내 입장을 정리하자면, 북한식의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는 민족주의를 우리는 직시하면서 가급적 지양해야 하며,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실용적 관점에서의 국가주의/애국심은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뭐 이 정도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반일 민족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일본 식민 잔재의 청산도 되는 것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