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하얀 가면을 벗겨라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한겨레신문사, 2003) 읽기
04.01.31 00:34l최종 업데이트 04.01.31 12:30l문형준(caujun)

유럽의 변방이었다가 17세기 말 이후 서구의 절대왕권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했던 러시아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문명 개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서구적 근대화에 몰두했던 한국은 개별적 경험의 차이는 있으나, 구조적인 공통점이 있다.

박노자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국가가 최고선이 되어서 국민의 저항을 무력화하고 근대화를 실천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국가주의, 민족주의 등을 개인에게 내면화시켜 개인을 우리 속으로 함몰시켰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라는 '신성한' 이름을 가지고 군대, 자본, 관료를 이용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정치인은 부패구조를 지속시켰고, 국민들은 이런 구조에 분노하면서도 철저히 '개인'의 가치를 내세우지 못한 채 공동체의 문화 속으로 빠져 들어가 무력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걸어온 폭력적 '근대화'의 길이 근본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기에, 억압자이면서도 '보호자'이자 '우리'의 화신으로 인식되는 국가와 군대, 그리고 관료층과 자본, 정치에 대한 '두 나라의' 서민의 태도가 놀랍도록 비슷한 것"(307)이라고 박노자는 진단한다.

그렇다면, 두 나라의 국민들은 서로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재인식하는 "유의미한 타자"(307)가 되는 것이 함께 발전해 나가는 길일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두 나라의 "학상배(學商輩)나 언상배(言商輩)"(309)들이 "지배층의 필요와 욕망에 걸맞은 '바깥'의 이미지를 대량 생산"(308)하고, 또 오리엔탈리즘에 물든 제국의 통신사들 역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의 틀에 맞추어 각 나라의 소식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인도 한국인도 다른 나라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아가 자신의 모습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박노자의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세계적 자본의 제국이 전세계의 정보 통로를 주름잡는 중심부의 미디어와 학술을 통해서 가리고 있는 세계 체제의 환부(患部)들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다."(309-310).

선명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저자는 제도 언론에 의해 재현되는 '하얀 가면'에 숨겨진 '제국'의 본 모습들을 우리에게 전달하려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나라,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본모습, 사회복지의 천국으로 알려진 북구의 현재는 제3세계의 착취로 가능해졌다는 얘기,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인 미국의 제국주의적 역사, 소위 '서방세계'로 불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2차 대전 중 행한 만행들, 이스라엘 건국사를 통해 본 극우 민족주의적 성격 등이 '하얀 가면의 제국'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서양에서의 불교의 유행 뒤에 숨은 보수주의적 구조, 북한에 대한 해외 언론의 왜곡된 이미지 만들기, 동학 해석을 둘러싼 한국 학자들의 서구 중심적 역사 인식,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칭송하는 태도 뒤에 가려진 서구적 근대에의 맹종,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연줄주의 등은 '하얀 가면'을 쓰고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한겨레21>에 연재한 기사를 묶은 이 글들은 러시아에서부터 노르웨이, 영국, 미국, 이라크, 폴란드, 투르크메니스탄, 이스라엘, 티벳, 중국, 일본, 북한, 한국의 역사를 망라하고, 스킨헤드, 체첸 탄압, 섹스, 교육, 2차대전, 노벨상, 기독교 근본주의, 홀로코스트 산업, 불교, 우생학까지 아우른다.

실로 방대하고 다양한 소재들이지만 막힘 없이 읽히는 이유는 이 다양함을 포괄하는 주제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기존 제도권 학자와 언론에 의해 숨겨져 있던 제국주의적 역사들을 제대로 전달하고 둘째로는 그를 통해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상대화해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첫번째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2004년을 맞은 언론사의 신년 기획들은 공통적으로 '한국 경제 살아남을 수 있는가'류의 제목으로, 한국이 세계 경쟁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식의 '위기론'을 퍼뜨리고 있다.

그 기사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우리의 경쟁상대는 소위 'BRICs'라고 불리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이다. 신문들은 눈물을 흘리며 외쳐댄다. 이제 2010년대가 되면 이 네 나라가 한국이나 일본을 따라잡고 미국과 유럽을 상대하게 될 것이라고!

이 기사들 속에서 러시아는 '개혁 지도자' 푸틴의 강력한 경제정책과 풍부한 지하자원, 자본주의 시스템으로의 확실한 전환을 통해 곧 선진국 대열에 끼게 될 '미래의 경제대국'일 뿐이다. 그 외에 우리에게 알려진 러시아는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모스크바에 테러를 가하는 체첸과 반란군을 진압하려는 러시아군 정도이다.

박노자는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허상이거나 왜곡된 이미지라고 말한다. BRICs 속의 러시아는 우리를 위협하는 경쟁 상대로만 보이지만, 사실은 천민적 자본주의의 대량 유입으로 사회의 안정성이 극도로 무너져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불안한 젊은이들은 유색인 유학생이나 노동자를 대상으로 인종주의적인 테러를 자주 벌이는데, 체제에 대한 불만이 그런 식으로나마 표출됨으로써 가라앉길 원하는 푸틴 정부는 이러한 테러를 못 본 척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1877년 러시아-터키 간의 전쟁에서 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자유도시'로 만들자는 제안을 반대하면서 "러시아는 슬라브의 각 민족보다 위대하고, 모든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도 그들보다 위대하다…우리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은 영원히 우리만의 도시로 남아야"(36) 한다는 글을 쓴 철저한 국가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체첸인들의 자살 폭탄 테러는 고대부터 코카서스 주변에 살아온 체첸 민족을 18세기 후반에 침공해 점령하였고 그 이후로도 자치권이나 독립을 보장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학살을 저지르는 러시아에 대한 체첸인들의 '민족적 저항'이라는 것 등이 박노자에 의해 '새로' 제공되는 정보들이다.

러시아의 경우만을 봐도, 우리가 어떤 나라의 이미지를 형성함에 있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 또 자본주의 경제와 권력자의 시선을 거쳐 나오는 정보들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들인지를 알 수 있다.

두번째와 관련해서는 동학 농민운동에 대한 박노자의 해석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국사 교과서를 통해서 '반봉건, 반제국주의, 근대지향적 민족운동'으로 규정되었던 동학 운동을 다시 보려는 시도이다.

저자에 따르면, "동학과 '민족, 국민, 근대' 등의 상징들을 남한에서 처음으로 연결시킨 집권자는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232).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한때 사회주의에 빠져 있다가 동지들을 밀고하고 살아남아 쿠데타를 통해 끝내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박정희는 소위 '조국 근대화'를 기치로 내걸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정당화했다.

그는 동학운동을 근대지향 운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조국 근대화' 구호를 역사적 필연으로 둔갑시켰고, 동학운동을 반봉건 운동으로 칭함으로써 조선-한국의 전통들을 모두 '미신'으로 몰아붙였으며, 동학운동을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호도하여 과도하게 기림으로써 자신의 친일행적이나 일제 하의 친일파 청산을 묻어버렸다.

어용학자들은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동학을 근대화 운동이라 주장하고, 민중 지식인들은 박정희에 반대하면서 동학의 저항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이 모두가 동학의 본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이 박노자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동학운동은 '근대'라든가 '반봉건', ‘'반제국주의'와는 별 상관이 없다.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밀지에 따라 청국과 손을 잡고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했는데, 전봉준이 대원군을 따른다는 것부터가 '반봉건'과는 맞지 않고 실제로 동학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비롯한 '인륜'을 되살리는 것을 주요한 주장으로 삼기까지 했다. 또한 청국과 손을 잡고 일본을 몰아내려고 한 것에서도 일말의 '중화사상'이 엿보이고, 이 과정에서 '반제국주의'나 조선의 자주권과 관련한 주장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난한 선비 전봉준은 '근대'라든가 '인류혁명'과 같은 일본의 신조어를 알 리 만무했다는 것 역시 박노자의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박노자의 주장이 기존 학계와의 논쟁을 예고하는 도발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고, 앞으로 좀더 정밀한 분석이 있어야 될 사안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혁명'의 대명사로 스테레오 타입화된 동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박노자의 주장은 의미 있다. 동학을 근대지향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나 반봉건 운동으로 의미화하는 것에서 이미 '근대'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 '봉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 있고, 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근대자본주의 시대로 구분하고, 그것만이 역사의 일반적 진행과정이라 생각했던 서양적 사고의 잔재가 동학운동을 보는 시각에 깔려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역사를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서양의 역사 전개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는 태도가 은연중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서양의 역사 왜곡들을 통해 우리의 눈을 상대화시켜야 된다고 말하는 박노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1부의 '가면을 버린 사람들'을 통해 드러난다. 러시아 음악계의 서구 중심적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이단아 유리 한인(Yuri Khanin), "나는 주권국가다"라는 좌우명을 가지고서 개인을 인정하지 않던 소련 사회주의를 비롯해 모든 국가 체제나 시스템에 끝까지 반대했던 '또라이' 알렉산드르 지노비에프(A. Zinoviev), 영국 노동당의 이라크 파병에 끝까지 저항하다 당원자격까지 박탈당한 영국 하원의원 조지 갤러웨이(George Galloway), 인도네시아를 착취하는 제국주의 네덜란드의 추악한 이면을 소설로 폭로한 에두아르드 데커(Eduard Dekker) 등.

그가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시스템의 논리에 개인의 자격으로 저항하면서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그가 역사의 가려진 책장 속에서 꺼내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알려지지 않은 위인들은 '나 혼자 힘으로 어찌 거대한 국가와 체제에 대항할 수 있을까' 하는 대다수 소시민들의 논리가 아니라 '물방울이 바위에 계속 떨어지면 언젠가는 구멍이 뚫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타협없이 저항했던 개인주의적 반란자들이다.

물론, 이러한 인물들은 박노자의 지향이기도 하다. 서양과 동양,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1세계와 3세계 그 어느 것도 선과 악으로 이분화하지 않고 언제나 그 속에서 선과 악을 함께 보려고 하는 태도, 그것은 백인의 얼굴을 가졌으면서 동양의 국가를 선택했고, 한 국가의 국민을 선택했으면서도 국가나 국민을 궁극적으로 거부하는 박노자 자신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태도다.

이 책이 봉헌된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그리고 체제 안에서 끊임없이 반체제적으로 사는 촘스키나 하워드 진처럼, 그 역시 언제나 반란자이기를, 소수자이기를, 쪼개도 쪼개도 나눠지지 않는 궁극적 개인이기를 소망한다.

박노자라는 학자의 이런 태도 역시 백인-중산층-교수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는 삐딱한 지적도 물론 있다. 그가 한국사회에서 대학강사의 자리를 얻고,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내고, 언론을 통해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백인'이 아니었으면 원초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 역시 서양을 무조건적으로 숭상하는 옥시덴탈리즘의 최대 수혜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전혀 일리가 없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시 한번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우리 안의 옥시덴탈리즘을 경계하게 하는 단초로 작용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좋겠다. 오히려 박노자를 계기로 우리 안의 좀 더 많은 다른 목소리들이 '커밍 아웃'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인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한국인 박노자가 됨으로써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상대화하여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날카롭고 빛나는 눈 하나를 더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구스(Argus)는 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잠을 잘 때도 두 눈만 감기 때문에 결코 경계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일상에 우리가 자신을 내맡기고 우리 안의 모순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때, 지구 저편 오슬로에서는 푸른 색 두 눈이 빛나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깨어있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