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어제 디베이트를 몇 장면 들여다보다가 그냥 그만 뒀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얼마나 말 잘하는 사람인지만 확인했고, 도널드 트럼프의 밑천이 거의 다 드러나보인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자기 감정도 제대로 조절 못하는 사람이란 것도 드러났습니다. 힐러리의 자신감이 보였고, 오히려 그 모습이 저로 하여금 채널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트럼프 밑천 드러났으면 됐지 뭐.
저 닳고 닳은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에게 내 표를 던져줘야 하는 게 싫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했던 버니 샌더스는 그녀를 지지한다고 말했고, 저는 버니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클린턴에게 표를 던질 겁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어제 트럼프의 '퍼포먼스'를 보고 엄청 실망했을겁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은 물론, 그를 반대했던 사람, 혹은 관망했던 사람들까지도. 솔직히 이번 메인 대선 토론회엔 트럼프 이외에 공화당 주자로 그동안에 나섰던 어떤 인물도 트럼프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그럴수밖에요. 어차피 그는 처음부터 정제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그런 말을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가 구축해 놓은 이미지로만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아프간 파병 이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레이건 등장 이후 공화당이 보여준 역사적 삽질은 미국에서 극우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줌과 동시에 그동안 공화당을 지지했던 전통 보수 세력을 멀어지게 했습니다. 공화당 안에서도 일종의 지지 스펙트럼의 양극화가 벌어졌고, 그들 중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섰습니다. 민주당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까지 민주당을 지지해 온 사람들 중 조금 더 좌측에 있던 사람들은 버니 샌더스를 지지해 주었고, 그를 경선 후보로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민주당의 메인스트림들이 화들짝 놀랐고, 경선 내내 샌더스를 방해한 거지요.
그리고 지금껏 제대로 된 싸움이 없었다가, 이번에 양당의 후보가 된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진검승부가 벌어진 거지요. 그리고 누구의 칼이 더 날카로웠는가는 그 결과가 그대로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트럼프는 깜이 아니었던겁니다. 그는 지금껏 정치혐오에 시달리던 공화당 지지자들이 자기들의 꿈을 실어 투영시킨 허상이었고, 미국 TV토론을 광대극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에게 자기의 정치적 꿈을 투영시킨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그가 미국을 강하게 만들어줄거라고, 미국이 다시 그 옛날의 영화를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겁니다.
그러나 그 '미국의 영화'가 뉴딜로 인해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노조가 가장 강했을 때의 산물임을 사람들은 잊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다시 그 옛날의 살기좋은 나라가 되려면 해답은 매우 분명합니다. 좋은 직장을 많이 만들고, 복지 혜택을 늘리는 겁니다. 저는 그나마 공무원이어서 이런 저런 복지 혜택들을 꽤 누리고 있습니다만, 제가 누리고 있는 이런 것들이 모든 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미국이 약해진 건 중산층이 약해져서인겁니다. 그리고 그건 어느나라에나 마찬가지 일이기도 합니다.
하긴 디베이트 잘 못해도 대통령 만들어주는 나라가 있긴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지. 그러나 적어도 미국의 대선 토론에서, 언론은 신랄하게 트럼프를 까내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는 어떤 철학이나 소신, 바탕이 아니라 이미지로만 그 자리에 간 거니까요. 문제는 힐러리가 어떤 식으로 버니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표심을 더 강력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녀가 말한 대로만 정책을 펼친다면 미국은 나은 나라가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약속한 정책에서 꽤 많은 부분은 내가 지지했던 사람, 버니 샌더스의 것을 받아들인 거니까요.
이미지로만 쌓아왔던 트럼프의 모래성은 허물어질 겁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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